언어의 한계
모든 사물은 이름 즉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대상을 당연히 인간에게 인식될 수 없으므로 그 자체로 깜깜한 어둠일 뿐이다. 나무도 꽃도 나무 꽃이라는 언어 혹은 tree,flower라는 언어에 의해서만 인간에게 인식될 수 있다. 결국 언어는 사물의 존재를 드러내는 유일한 수단인 셈인데, 역설적으로 언어의 근본적인 한계 역시 이런한 언어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떳떳한 도가 아니요, 이름을 이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떳떳한 이름이 아니다
도에 대해 논하면서 도를 도라고하는 것은 도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도덕경의 첫구절은 참으로 역설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노자의 유명한 이 말은 언어로 명명할 수 없는 도의 본질을 밝히는 말인 동시에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결함에 대해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자 역시 도달하지 않는 도만이 참다운 도이며 지극한 말은 말을 버린다고 하였다. 노자와 장자는 물론 도라는 것이 고정불변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이 도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는 철학적인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말은 동시에 인간의 언어는 도의 본질을 담을 수 없다는 인식이기도 하다.
앞에서 우리는 언어가 나무,꽃과 같은 구체적인 사물이나 인간의 감정이나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들을 추상화하여 우리에게 인식 시키는 역할을 담다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수 없음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인식할 수 없음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언어를 통해 기호화, 혹은 추상화된 세상은 사는 것이며 언어의 울타리 속에서만 세상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과의 불일치
언어가 사물, 관념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언어가 진리를 숨기거나 혹은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탈리란드는 "언어는 인간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김춘수의 꽃은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대상이 꽃으로 인식되었다고 했으나, 다르게 생각하면 꽃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꽃이라 명명됨이 고작 꽃이라는 한 단어 속에 갇히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유동적인 현상이나 생동하는 대상을 언어라는 고정된 틀 속에 담아야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현실을 놓치고, 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못할 수밖에 없다. 동물의 울음소리나 물 흘러가는 소리도 멍멍, 졸졸 등의 언어로 드러난다면 이것은 이미 언어일 뿐 있는 그대로의 소리 자체는 아니다. 또, 누군가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 역시 사랑한다, 고맙습니다'라는 언어로 드러난다면 절절한 감정은 언어의 뒤로 숨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벌레를 가르쳐 해충이라고 부른다면 이 때의 언어란 대상의 본질마저도 왜곡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 벌레는 나름의 생명을 가진 대상이지 해충이 그 벌레의 본질은 아니지 않겠는가.
언어는 본질이 아니다.
도라는 언어가 도를 다 담아낼수 없는 것처럼 언어는 대상을 가리키는 기호일 뿐 그대상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특히, 인간의 미묘한 감정과 정서, 오묘한 사상은 적잖은 말에 의해 표현되지 않으면 적어도 그 깊이와 오묘함은 곧 사라져 버린다. 인간의 정서와 사상은 결코 언어의 그릇에 완전하게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절경을 대하고 이루말로 형용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가 없으면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언어가 아니고서는 대상을 인식하 수도 없다. 그러나 대상이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대상의 본질이 언어의 그릇에 갇히게 되는 결과를 불러온다. 석가모니는 입적하기 전 제자들을 모아 놓고 자신은 평생을 설법했지만 사실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노라고 말했다. 이 말 역시 노자의 전언처럼 언어가 가지는 한계, 즉 언어는 대상을 나타내는 기호일 뿐 대상 자체는 아니라는 언어의 근본적인 결함에 대한 고찰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언어와 현실
언어는 현실의 대체물
우리는 닭이 울 때 꼬끼오라고 운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잘 들어 보라. 이런 동물은 결코 하나의 확정된 음운으로 소리내지 않는다. 미국 사람들은 닭의 소리를 코코두둘두라구 쓰고 그렇게 운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것도 정확한 실체는 아니다. 자연계의 소리는 소위 음향이라 구별하여 인간의 언어로 고정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 하구 우리는 꼬끼오라는 글자(언어)로 닭의 소리가 사실대로 표상된 것으로 인정하다. 인정할 뿐아니라 그 음운이 닭의 소리의 실체를 묘사한 소리보다 더 실재에 가깝다고 믿고 있다. 언어 습관에 때묻지 않은 아이가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鱁鱁鱁鱁......로 표기했다고 하지만, 그런 탁월한 감각보다 졸졸졸이 휠씬 쉽게 시냇물의 음가를 표상한다.
우리는 무지개가 빨강부터 보라까지 일곱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한자어로는 오색 영롱한 무지개라고 규정한다. 다른 민족은 세가지 색깔로 무지개를 인식해도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나 실상 무지개의 색깔은 무수히 많은 색이 겹쳐져 있다. 그냥 일반인의 눈으로 보아도 무지개에 흔히 말하는 20개 색상이 다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가지나 7가지의 색으로 무지개를 규정하고 보면 그런 존재로 인식되어 불편함이 없다.
언어는 과연 실체인가
이는 우리가 언어를 표상으로 실체를 보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나라 말에는 강도 들도 바다도 하늘도 다 푸르다. 회색이 없는 인디언 언어에서는 조금 검은색과 조금 횐 색뿐, 그 가운데 중간 색은 구별하지 못한다 이로 본다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실체는 뒷전에 밀리고 언어만 있다. 사피어와 워프가 말한대로 우리 인간은 언어로 분절되고 규정된 방식으로만 현실을 인식한다.
이는 도형에서도 마찬가지다. 별은 실상 무한대의 빛의 드나듦으로 불규칙한 가장 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엇갈린 오각형으로 별을 규정한다. 장미꽃도 침엽수도 집도 실제선을 따른 그림보다 정형화된 도형으로 더 선명하게 그 존재를 표상한다. 그러나 종이 위에 도형으로 남겨진 장미꽃과 집은 실제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어느새 실체보다 그 표상물에, 곧 그것을 나타내는 기호에 더 익숙한 지각 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표상물이 실체는 아니다. 언어로 조직된 개념은 어디까지나 대상을 재현한 것인지 그 실제는 아닌 것이다. 언어로 조직된 소설이나 학문도 얼마간 사실성과는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언어로 기록된 모든 역사, 그리고 언어를 바탕으로 이룩한 문화, 그런 논리 체계로 확정된 모든 학술적 진리들이 어쩌면 실재적인 진실, 진리와 전혀 다른 허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의 비현실성과 그 의미
언어로 현실을 대체하지 않고는 의사 소통도 그로 인한 문화의 형상과 발전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과 언어의 구조물로서의 현실 체계는 실제 현실과 불가피한 가역성을 가지게 된다. 소설이 아무리 있는 현실을 그대로 그려내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를 확보할 뿐이지 실제 그대로일 수 없다. 언어로 전달되는 사실은 어느 정도 윤색이 불가피하고, 전달 과정에서 오해도 생겨난다. 언어를 현실의 등가라고 인정하지만 결코 현실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생가는 모순이다.
그러나 이런 언어의 불완전성은 우리 인류가 진리를 추구하는 속성과 더불어 보다 발전된 문화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바탕이 되었다. 언어는 신의 표상이다. 현실에서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언어라는 체계 속에서나마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상적인 진리성을 찾는 노력을 통하여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올 수 있었다.
참고 자료
노자
중국 고대의 철학자, 도가(道家)의 창시자.
성명 이이(李耳). 자 담(聃).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허난성[河南省] 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사상】 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 ·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 ·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전개】 노자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한(漢)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黃老)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漢高祖)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東漢)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張道陵)이 노자를 교조(敎祖)로 추존(追尊)하고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하안(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王弼)이 노자주(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格義)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科儀)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山林)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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