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동설을 주장한 조선의 갈릴레이 홍대용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지구가 지축의 둘레를 하루에 한 바퀴씩 돈다는 자전설을 주장했다. 또한 그의 바람, 비, 구름, 눈, 서리, 우박 , 우레, 번개, 무지개, 기온등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은 현대의 과학적 설명과 그다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 말은 갈릴레이가 1616년 당시 서양 중세 사회를 주도하던 기독교적 세계관과 대립되는 지동설로 인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을 포기하도록 명령받고, 고뇌에 차서 내뱉은 말로 유명하다. 비록 사회적인 압력에는 굴복했으나, 과학으로서의 진리를 포기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이것은 갈릴레이 이전에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했던 지동설에 대해 좀더 과학적인 자료를 가지고 그 정당성을 입증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과학시간 혹은 역사 시간 때 흔히 들어본 낯익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시기에 지구가 돌고 있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과학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조선시대에 앞선 서양의 과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론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과연 그는 누구이고 그러한 이론이 나올 수 있었던 시대적인 배경은 어떠했는가? 조선시대는 중기 이루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성리학이 기가 먼저니 이가 먼저니 하면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면서 모든 학문적인 역량을 소모하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 해결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은 탓에 실생활에서 너무나 뒤떨어진 부분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리학의 공리공론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실천적인 학문을 주장하는 실학이 등장했다. 당시 실학파들은 사회 구석구석 모든 분야에 걸쳐 실증적인 태도로써 개혁을 시도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자연 과학적인 사고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지동설로도 나타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답게 홍대용은 세계 최초의 지동설 주창인 갈릴레이의 두 우주 구조에 관한 대화와 같은 서술 방식으로 의산문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먼저 갈릴레이의 두 우주 구조에 관한 대화의 서술 방식은 지구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 구조와 태양 중심의 코페르니쿠스 우주 구조의 장단점을 토론하는 대화형식이고 홍대용의 의산문답의 서술 방식은 허자와 실옹이라는 두 사람이 문답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동설에 관한 두 인물의 학문적 성과가 이처럼 유사한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실학파 중에서도 북학파의 한 사람이었던 홍대용은 학문, 사회, 국가, 역사 등 다방면에 걸쳐 자신의 관심을 드러냈는데 그 가운데 홍대용 사상의 독창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분야는 바로 자연관, 다시말해 자연과학에 관한 것이었다. 이전까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수천년 동안 내려온 우주와 자연에 대한생각이 비과학적인 면을 비판하면서 그는 현대 과학과 그 방법이나 태도에 있어서 거의 유사한 실증적인 태도로서 자연을 분석하고 관찰하였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지구가 지축의 둘레를 하루에 한 바퀴씩 돈다는 자전설을 주장하였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해와 지구의 인력에 관한 착상으로서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태양계와 우주 해와 달과 지구의 크기를 비교하여 바람, 비, 구름, 눈, 서리, 우박, 우레, 번개, 무지개 등 자연계의 여러 현상, 그리고 기온, 주야의 시간차, 조석 등에 관해서도 관심을 자기고 그 현상들을 현대 과학이 말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설명해 나갔다. 또한 홍대용은 당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과학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가 견지하고 있던 자연현상을 보는 새로운 태도는 기존의 뿌리 깊은 동양적 과학관의 바탕인 음양오행설을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것은 성리학이 보인 현실적인 폐단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홍대용이 음양오행설을 비판한 것이다. 5행의 5라는 수는 원론 정론이 있을 것이 아닌데, 술가(술가:음양, 점술에 정통한 사람)들이 이를 근본으로 삼아 하락이 여기에 부회(말을 억지로 끌어대어 이치에 맞게함)하고 역상이 이를 천착해 상극이니 비목이니 지리 장황하게 되었지만 아무 이치에 없는 것이다. 홍대용은 의산문답 이라는 저술에서 허자와 실옹이라는 두 사람의 문답을 통해 실학자인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앞에서 음양오행을 비판한 것도 그것이 이와 같은 실심, 실사, 실학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었다. 홍대용이 음양오행설을 비판했다는 사실은 의미 심장합니다. 중국에서 우리 나라로 건너온 사상엔 유교 불교 도교가 있습니다. 실학이 유교의 반동으로 태동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학도 청나라의 고증학을 비판 수용했다는 점에서 유교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조선 시대의 유학자의 한 흐름인 서경덕 이항복 등이 음양오행설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홍대용의 실학 사상을 받아들인 정약용 또한 음양오행이론을 연구했다는 점에서 기이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홍대용은 과학적 사고, 즉 과학성신에 위배되는 것을 모조리 비판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른 사실을 자기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표현의 자유를 강조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이 그것을 잘 증명해 줍니다. "우리 나라 중엽 이후로 편론이 나와 시비가 공정하지 않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주자학에 배치되는 양명학을 존중하는 자도 많지만, 이 때문에 죄가 된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다음은 의산문답에서 허자와 실옹이 지구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는 내용으로 실옹이 허자에게 자신이 연구한 결과를 가르치고 있는 대목이다. 이 글을 통새 당시의 홍대용이 과거의 학문에 대해 보이는 비판적인 태도와 그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는 실증적인 자세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허자: 예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선생은 어찌하여 땅덩어리가 둥글다고 하십니다? 실옹: 사람을 깨우치기란 심히 어렵도다, 만물이 완성된 형태는 둥근 것은 있어도 네모진 것은 없는데 하물며 땅덩어리야 말할 것이 있겠소? 달이 해를 가려서 일식이 될때 일식된 부분이 둥근 것은 땅덩어리가 둥글기 때문이오. 그런 즉 월식은 곧 땅덩어리의 거울이오 월식을 보고도 땅덩어리가 둥근지를 모르는 것은 거울을 가지고 자기를 비춰 보고도 자기 모습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또한 어리석지 아니하오? 그대는 계 사람의 말을 그대의 눈으로 본 일식 월식의 실제 모습보다도 더 믿는단 말이오? 그리고 땅덩어리가 진실로 네모지다면 네 귀퉁이, 여덟 모서리, 여섯 면이 꼭 같고 그 측면은 담벼락처럼 가파를 것이라는 말이 되는데 그대의 생각도 이와 같소? 허자: 그렇습니다. 실옹: 그렇다면 강이나 바닷물이며 삶과 물체들이 그 네모진 땅덩어리의 한 쪽면에만 모여 있소? 아니면 여섯면에 다 널려 있소? 허자: 윗면에만 모여 있을뿐이며 옆면과 아랫면에서는 옆으로 살거나 거꾸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있을수 없는 일이옵니다. 실옹: 만일 옆면에나 아랫면에서 산다면 밑으로 떨어지겠지요? 허자: 그렇습니다. 실옹:그렇다면 사람 물체와 같은 작은 것들도 떨어지게 마련인데 어찌하여 이 무거운 땅덩어리는 밑으로 떨이지지 않는 것이오? 허자: 기가 믿에서 받쳐 주기 때문이옵니다. 실옹:(소리높여 말하기를) 군자가 도를 논할 때는 이치에 막히면 승복하는데, 소인이 도를 논할때는 말이 막히면 꾸며대기 일수요. 배와 물의 관계를 보더라도 배 안이 비면 물위에 뜨고 배 안이 차면 가라앉는 것은 기라는 것이 무력하기 때문인데, 그 기가 어떻게 큰 땅덩이를 받치고 있을 수 있겠소? 지금 그대는 낡은 지식에만 집착하여 남에게 이기려 들고 경솔한 말로 사람을 누르려 하면서도 도를 들으려 하니, 이 또한 어긋나지 않소? 소옹은 이치에 밝은 선비로되 땅덩어리에 대한 이치를 궁구하다가 끝내 터득하지 못하자' 하늘은 땅에 의지하여 있고 딴은 하늘에 붙어 있다'고 하였소. 땅이 하늘에 붙어 있다고 한 것은 옳다고 하겠지만 하늘이 땅에 의지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크고 넓은 태허(우주공간)가 이 한 흙덩어리에 의지한다는 말이오? 또 땅덩어리가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 자체의 세기가 있기 때문이지 결코 하늘에 이어져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오. 소옹은 지혜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자 억지로 큰 소리를 쳐서 한 시대를 속인 것이니 이는 소옹이 자신을 속인 것이오. 허자:(절을하고 다시 말하기를)제가 실언하였으니 어찌 허물을 모르리오마는 그러나 비록 터럭과 같이 가벼운 물체도 떨어지는데 그 무거운 땅덩어리가 영구히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오리까? 실옹: 낡은 지식에 집착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도를 논할 수 없고 이기려고만 생각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입다툼을 할 수 없는 것이오. 만일 그대가 도를 묻고자 한다면 그대의 그 낡은 지식과 생각을 버릴 것이며 마음을 비우고 말을 신중히 해야 할 것이오. 그러면 내 어찌 드러내지 않으리오. 무릇 넓고 큰 태허는 육합의 구분이 없는 것인데, 어찌 상하의 세가 있겠소! 허자:...... 실옹: 자, 말해보시오. 그대의 발이 아래로 땅에 붙어 있는데 그대의 머리가 하늘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해와 달과 별은 하늘에 떠올라도 위로 올라가지 않으며 땅으로 지고 무너지지 않고, 허공에 달려 영구히 그대로 있으니, 태허에 상하의 세가 없는 증가가 너무도 뚜렷하오. 땅덩어리가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사실만 해도, 진실로 그 까닭을 추구한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오. 땅덩어리 위에는 상하의 세가 있는데 이것이 곧 지면의 세이오. 땅에서 거리가 멀어 지면 이 세도 자연 없어지는 것이오 오늘날 사람들은 지면의 상하의 세를 보고서 태허에 일정한 세가 있다고 잘못 생각했으니, 이 또한 좁은 소견이 아니겠소? 허자: 그렇군요. 지구의 형체와 상하의 세에 대하여 잘 알았습니다. 생각해 보기 논제15-4 윗글에서 실옹이 허자를 비판하는 근거를 찾고 실옹이 지구의 형체와 상하의 세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방법적인 특징을 구술하시오.(400자 내외) 조언 `첫째 허자가 현실의 관찰과 실험들을 통한 실제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다만 과거의 경전에 나오는 옛 사람들의 근거없는 말을 무조건 믿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둘째 그러한 자신의 죽은 지식을 비판하는 새로운 주장에 대해 수긍하기보다는 역으로 비판하려들고 과거의 지식에 얽매이는 자세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실옹은 땅덩어리에 나타나는 상하의 세. 즉 오늘날의 과학을 빌려 이야기 하자면 중력과 갈이나 해 별사이에서 나타나는 힘의 관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이것은 위와는 달리 관찰이라는 방법이 아니라 논리적인 추론의 과정을 통한 것이다. 참고 자료 이제 세계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서양에서도 근데 뉴턴의 역학법칙을 바탕으로 한 기계적이고 절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좀더 복잡하고 불확실한 현상을 인정하는 상대적이고 유기적 사고로 전환되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를 위해 동양문명이 오래 동안 자연과의 교섭에서 발전시켜 온 유기체적 사유에 대해 재조명이 필요함. 이런 관점에서 조선 중기까지 이어온 동양적인 사고 즉 성리학의 바탕에서 실증적인 태도를 동시에 견지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과학하는 태도는 그 바람직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실학자들은 처음부터 기존 성리학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성리학이 보인 현실에 대한 무기력함을 비판하는 태도를 지녔다. 실학자들이 등장하기 이전 기존 성리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실학자들의 사상과 통하는 면을 보이는- 원리나 원칙보다는 실물. 기의 존재를 더 기본적인 것이라고 본 - 서경덕의 기철학을 시작으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보여준 여러 분야에 걸친 업적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우리 나라 전래의 과학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없애는 시발점에 불과하다. 한국적 가치와 역량을 다 알기에 우리의 의지가 너무 나약함을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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