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저: http://armymission.org/2005-12/silla.htm
신라의 기원
최근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고 북방계와 남방계로 두 계통의 갈래를 갖는다는 이중 기원설이 최근에 유전자기법을 이용해 증명되었다
단국대 김욱 교수는 한국인의 Y염색체를 분석한 결과 한국 남자의 유전적 계통이 그룹C(RPS4Y), 그룹D(YAP), 그룹O(M175)의
세가지 형태를 보인다고 발표했다. 김교수는■몽골, 시베리아인의 경우 그룹C가 40~50%를 차지하지만 한민족은 15%에 불과해
몽골쪽에서 모두 내려왔다고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서정선■한림대 김종일 교수 팀도 최근 미토콘드리아DNA를 이용해
한국인의 기원을 탐색한 결과 가야시대 고분에서 인도인과 비슷한 DNA 염기서열을발견했다. 김종일 교수는 ■우리 민족이 몽골,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경로와동남아 쪽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두 가지 경로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밝혔다. 역사적 기록들은
어떠한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의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 38년에 기술되기를 중국사람들이 진의 난리를 견디지 못해 동쪽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마한의 동쪽에 자리잡고 진나라의 유민들의 나라라는 의미로 진한이라 나라이름을 정하였다 진한은 후에 신라가 되었음은
주지의 역사적 사실이다. 진한이 후에 점차 번성해지자 마한이 진한을 꺼려했다 고 적고있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편' 진한조에
이르기를 진한의 노인들은 자신들은 진나라 망명객들이라고들 말한다고 한다고 기록하고있다 . 진한 즉 중국에 있었던 서신라에 관한
기록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수서(隋書)에 의하면, 위(魏)와 고구려의 싸움으로, 신라인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BC.57■AD.918년:975년)
신라의 건국은 걸의식국(乞衣食國:가난한 나라)에서 비집기국가(飛集其國家:부강한 나라)로 변모한 경위는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
속집(續集) 권1 본문 113쪽에
新羅國有第一貴族金哥其遠祖名旁?. 有第一人甚有家財其兄旁?.
因分居乞衣食國人有與其隙地一묘乃求蠶穀種於弟弟蒸而與之?不知也.
至蠶時有一蠶生焉. 目長寸餘居旬大如牛食數樹葉不足其弟知之.
伺間殺其蠶經曰四方百里內蠶飛集其家國人謂之巨蠶意其蠶之王也■
신라의 제일 귀족은 김씨인데, 먼 조상은 김방이이다. 당대의 일인자였으며 유복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리하여 분가하여
나누어져 살게 되었다. 그런데 가산이 몰락하여 나라를 세워야겠지만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얻어먹으면서 나라를 지켜야겠기에 걸의식국(乞衣食國)이
되었다. 유복하고 재산도 있는 집안 사람들은 많았지만 어쩐지 틈이 생겨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밭을 하나 일구고 누에를
치기로 했다. 그리고 씨를 뿌려 곡식도 동생과 함께 심었다. 그런데 언제인지 형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때가 되어 누에가 한잠을 자고 일어났다. 십여 일이 지났다. 동생은 눈이 쑥 빠진 듯한 모양이었다. 마치 소가 여물을 먹고 싶지만
먹을 나뭇잎이 부족한 것처럼 동생을 형을 찾아 돌아왔다. 소문을 들었는지 몰라도 동생은 사람을 죽인 사람처럼 살피기 시작했다.
누에는 날이 갈수록 번성하고 소문이 났다. 사방 1백 리 내에 온통 누에가 날아들어 모였다. 그래서 비집기국가(飛集其國家),
즉 누에가 날아와 집이 모인 나라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엄청난 누에 때문에 이룩된 누에의 왕이었다. 그래서 나라의 이름이 “실이
난다” 라고 해서 신라이며 실크 로드라는 이름의 근원이 중국에 있던 신라(서신라)의 금(錦:비단) 즉 실금의 길에서 유래된 것으로
봐야 한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一篇에 보면 한(漢)나라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BC.57년) 갑자(甲子) 4월 기사(己巳)에 거서간(居西干)이 즉위하였다고 했다. 거서간(居西干)이란 서쪽에서 살다온 한국인이란 뜻이다. 그 당시 나라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 했으며, 조선유민(朝鮮遺民)이라고, 1927년 11월 일제시대 금소룡(今小龍)과 이병도(李秉燾) 등이 친일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사학회(朝鮮史學會)의 교정을 거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서야벌(西耶伐:서쪽에 있는 자들을 칼로서 치겠다)의 서(西)자를 서(徐)자로 고쳐 서야벌(徐耶伐:백제 서씨들을 칼로 치겠다) 로 바꾸어버렸다. 거서간(居西干)은 서야벌(西耶伐)이라고 해야 말이 일치된다. 三國 史記 百濟本紀 第六 義慈王篇와 경주의 태종무열왕 비석에는, 신라의 조상이 소호 금천씨(小昊金天氏)로 되어있다. 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는 황제(黃帝)의 아들이다.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 BC.2578년)의 후손인 진시황제(秦始皇帝 BC.255년)의 진(秦)나라는 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에 도읍하여 六國(魏, 韓, 趙, 燕, 楚, 齊)을 통일했다. 그 후 진(秦)나라인 진한(秦韓)이 망하자 동쪽(한반도)으로 조선유민들이 몰려와 서야벌(徐耶伐)이 아닌 서야벌(西耶伐)을 세웠다. 이때 육촌(六村)이 아닌 육부족(六部族)들이, 서쪽에 있는 자들을 정벌하겠다는 의지로 서야벌(西耶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진(秦)나라인 진한(秦韓)이 망했기에 다시 별처럼 일어나겠다는 뜻으로 진한(辰韓)이라고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양서(梁書)에 잘 나타나 있다.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去之以秦人故. 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有似.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의 뿌리이다. 辰韓은 역시 말하자면 秦韓이라고 했다. 서로 거리가 만리(萬里)였다. 전하는 말로는 진(秦)나라 세상이었으나, 진나라가 망하자 사람들이 마한의 동쪽 지역으로 가서 살았다. 그러므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북방출신으로 중국에 살던 삼조선 중 진한 사람들이 양자강 중류에서 진나라의 침공을 피해 경주 부근으로 탈출해온 사람들이 핵심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가 남방계민족들의 연합정권이라는 증거문헌들을 훨씬 더 많이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김부식이 고려신하였던 김부식이 신라 출신이므로 자신들이 고구려 백제와는 다른 계통이라는 것을 되도록 감추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김부식은 나아가 자신들의 모국인 중국을 더 친근하게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고려와 어떻게든 중국과 관련지으려고 했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런 결과 북방계인 고구려와 백제가 성씨에 대한 개념이 희박한가운데 남방계인 신라나 가야족속들은 일찍이 한자 성을 가지고 있었음은 여러 이주 경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대다수인 중국 유이민들에게는 자신들의 모국에서의 전통인 성씨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더욱이 기원전 그 당시 한자를 알고있었다는 사실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더 먼저 한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는 사실'金' 씨는 보석 금을 뜻하는 말로 그들은 이미 한반도로 올 때 성씨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朴이란 木로 卜점을 치는 샤마니즘의 주술사라는 뜻으로 박(朴)이라 했는데 그들 지배층이 나타난 시기가 바로 진나라 멸망 이후이며 그들 입으로도 진나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들 하지 않는가(삼국사기, 삼국유사 참고) 한편으로 신라는 아라비아에까지 금이 많이 난다는 소식이 전해져 많은 아라비아인들이 '金'을 찾아신라로 들어가 들어가는 사람들마다 눌러않아 살았다는 아라비아 측 문헌들을 소개한다.
아랍, 이슬람세계의 기록
1.이슬람의 저명 역사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AL Masaud :?~~965) 는 그의 저서 '황금 초원과 보석광' 에서 "
신라에 간 이라크 사람들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신라가 살기가 좋아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곳신라를 떠나지 않았다“
2.아람의 저명 지리학자인 이븐 쿠르다지바 (Ibn Khurdadhibah :820~912) 는 그의 저서 '도로 및 왕국 총람'
에서 "중국의 맨 끝에 있는 '금(金)'이 많은 신라라는 나라에 들어간 무슬림들은 이 나라가 너무 좋아 절대로 떠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있다.
3.'삼국사기 헌강왕조'에도 왕이 나라의 동쪽을 시찰하는데 모양이 해괴하고 옷 차림새도 이상한 사람들이 왕의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
4. 아랍인의 형상이 뚜렷한 경주 괘릉의 무인석은 이슬람인들이 신라지역에 많이 이주해 살았다는 또 다른 기록이다. 신라의 6부족인
석탈해 석씨는 이미 일본측에서 온 사람으로 문헌과 유적 발굴등으로 확인되고 있다(북방계인 고구려 백제와 전혀 다른 신라문화유적과
관련 참고문헌 로마문화왕국 신라 (씨앗을 뿌리는 사람)) 지금까지 밝혀진 결과를 종합하면 신라는 가야가 일본계가 주류를 이룬다는
사실과는 다르게 북방(우랄알타이) 출신 중국계가 주류이고 여기에 인도(김수로왕비:유대인일 가능성이 농후함), 아라비아계 스키타이,
일본계가 뒤섞인 연합국가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해 보면 최초 반도신라 건국은 박씨, 석씨, 김씨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었고 점차 제사권을 가진 박씨에게로 세력이 기울어진 것 같다. 박씨가 권력을 가지고 있던 시기는 중국에서 반도로 탈출해오는
과정과 건국초기 과정을 제사와 복술을 가진 지도집단이 이끌었음을 의미한다. 즉 개척되지 않은 새로운 땅에서의 삶은 당연히 어떤
형태로든 종교가 기초가 되는 것임을 세계역사와 문화인류학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와 관련 진나라 때 양자강 중류에서 신라 사람들의
반란이 있었다는 것과 그 시조가 박씨로 계림이라는 마을의 나무 아래 박에서 천기를 받아 태어났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흡사한 중국의
기록도 있다. 김씨들에 관해서는 태종무열왕 자신이 조상이 헌원(동아족 중국의 시조, 치우천왕과 탁록에서의 전쟁을 일으킨 북방
민족의 지도자)의 아들인 소호금천씨라고 밝힌바 있다. 한때 중국을 호령하던 동이족들이 한반도 남쪽을 거점으로 그들에게 익숙한
철기, 청동기, 문명을 가지고 쇠(일반적으로 모든 금속)를 통해 돈과 권력을 만든 집단이었다가 중국의 통일분위기에 좆겨 한반도로
이주해온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골품제는 김씨의 혈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었을 것이다. 각 민족을
출신지에서 전통으로 지켜온 좋은 제도들을 새로운 땅 끝 나라인 동신라를 건국하면서 만들었고 중국 진한즉 서신라의 건국 역사기록을
그대로 경주로 가지고 왔다. 신라가 가지고 있던 당대 최고의 종교, 정치, 경제, 사회, 군사조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솟대신앙은 셈계 제사장들이 우랄 알타이로 가져온 천신 신앙이고 둘째 김해, 부산을 통해 일본과 중국에 팔았던 솥, 병기 , 농기구들
쇠를 만드는 기술은 우랄알타이-치우 천왕-3조선,-신라에 이어진 알타이 철기문명 유산이고 화랑제도는 말 조련기술, 전쟁기술 등과
같이 단군의 계통에서 일본의 경주침략을 막기 위해 불러 경주로 들어오게 된 스키타이계 무사집단(나중에 경주김씨. 김해김씨, 안동김씨로
유입)의 유산이며 화백제도는 로마의 공화정에서 유래된 것으로 아라비아인들과 스키타이인들이 가져온 제도였다. 그래서 신라조정에서
사용한 언어는 우랄알타이어를 비롯한 한문 언어,(설총이 중국어를 이두로 만든 것), 아라비아어. 일본어, 인도어 유대언어 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신라는 당시 온 세계 문명국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세게 최고의 이상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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