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양개선·살균작용 … 작물생육 도와
유기농업을 하면서 지렁이와 그 똥(분변토)에 대해 관심을 갖는 농업인이 부쩍 늘고 있다. ‘자연의 쟁기’ ‘지구의 창자’ 등 별명에 잘 드러나듯 지렁이가 많이 있는 토양은 비옥하고 농사에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일부러 지렁이를 사육해 넣어주거나 생육을 돕는 일은 그다지 흔치 않았다. 또한 실제 지렁이똥에는 비료성분이 그다지 많지 않고, 무엇을 먹여 길렀느냐에 따라 중금속이 검출될 수도 있어 비료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지렁이똥만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 쿠바 농업인들의 사례가 전해지면서 큰 반향이 일었다. 특히 농장 한 귀퉁이에 허름하게 사육장을 만들어 지렁이 분변토를 자급하는 형태가 많이 보급되고 있다.
◆지렁이는 농사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우선 지렁이는 농경지의 유기물과 흙을 먹어 분해한다. 이것을 똥으로 배출하는데 토양과 작물에 비료분을 공급하고 물리성을 개선하는 기능을 한다. 마디의 배쪽 구멍에서 끈끈한 액체를 내뿜는데, 이것은 비료분을 공급할 뿐 아니라 살균작용 등도 한다.
또한 이리저리 꿈틀대면서 땅을 파고 다닌다. 흙을 미세하게 가는 효과가 있어 바람을 잘 통하게 하고 비료분과 물이 이동하는 통로로 이용된다. 뿌리와 각종 토양미생물도 이 구멍을 통해 움직인다. 마지막으로 지렁이가 죽으면 그 사체는 최고의 즉효성 비료로 쓰여 작물 생육을 돕는다.
이 같은 5가지 기능에 의해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도 작물의 수량과 품질을 충분히 향상시킬 수 있다. 특히 아미노산과 무기양분, 각종 비타민의 함량이 많이 높아지는 것으로 조사치가 나타나고 있다.
◆병 발생을 줄이는 역할도 한다=지렁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각종 병원균의 발병을 억제한다. 대장균과 살모넬라균·모잘목병(입고병)균 등은 직접 먹어치워 원천봉쇄하며, 사과 검은별무늬병(흑성병)은 병원균이 사는 집을 먹어버린다.
뿌리썩음병과 위축병 등은 병원균의 생활조건을 악화시켜 발병을 줄인다. 밀 모잘록병은 작물에게 길항균(병원균의 생육이나 증식을 억제할 수 있는 미생물)을 전해주고 생육조건을 좋게 해서 병을 억제한다. 다른 원형동물들도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좋아하는 환경과 싫어하는 환경=지렁이 개체군의 크기는 토양의 유기물 함량·산도·습도·온도·경작방식 등에 따라 좌우된다. 보통 산도(pH) 5.5~7, 수분함량 60~70%, 온도 12~25℃에서 잘 자란다.
반면 지나치게 습하거나 산소가 부족한 혐기상태, 극단적인 산성 또는 염기성, 바싹 마른 땅, 발효가 덜 된 축분이나 음식물 쓰레기 등을 넣어 염분이 높은 토양, 농약·화학비료 탓에 화학성이 변한 경우에는 살지 못한다. 로터리 작업도 지렁이 생육에 좋지 않다.
◆지렁이의 종류=지렁이는 사막과 극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발견되며 종류는 3,500종이 넘는다. 우리나라에는 낚시지렁이과(Lumbricidae)와 염주지렁이과(Moniligastridal)·뚱보지렁이과(Megascolecidae)·엥키트레이과(Enchytraeidae) 등 수십종이 살고 있다.
이 중 농업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붉은줄지렁이와 팔딱이지렁이 등 사육종과 과수원 등에서 흔히 발견되는 밭지렁이·외무늬지렁이 등이다.
◆신체 구조와 습성=지렁이는 길쭉한 환형동물로 수많은 마디가 이어진 모양이다. 머리쪽에 감각기관이 몰려있지만 눈·귀·코는 없다. 대신 피부에 빛을 느끼는 세포가 있어 밝고 어두움을 구분하고 어두운 곳을 찾아 움직인다. 각 마디 배쪽에 구멍(배공)이 있어 끈끈한 액체(오줌)를 내뿜는다. 지렁이는 암수한몸이지만 자체수정은 하지 못하고 교미를 한다.
땅속 2.5m 이상 파고 들어가 땅을 일구며 1㎡ 안에 250마리까지 살 수 있다. 잡식성으로 무엇이든 잘 먹는다. 특히 폐지나 음식물 찌꺼기·생활하수 등 각종 폐기물을 깨끗하게 먹어치우고 냄새까지 싹 없애는 탈취제 역할까지 하기 때문에 산업용으로도 많이 활용된다. 하루에 자기 몸무게의 80~120%를 먹는다. 봄철에 부화해서 대부분 추운 늦가을에 접어들면 죽지만 온도만 맞춰주면 10년까지 사는 종류도 있다.
배설물에 비료성분 듬뿍…토양구조도 개선
지렁이는 대단히 유용한 생물로 그 활용분야가 경종·축산 등 농업뿐 아니라 환경처리·식품·의약품·레저(낚시) 등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지렁이에 대한 연구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으며 특히 농업분야 연구는 황무지이다시피 하다. 실제 활용에 있어서도 지렁이 분변토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는 지렁이 자체와 똥·오줌이 흙과 뒤섞여 있고, 미생물과 작은 동물들이 어울려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지렁이 분변토의 성분과 효능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이들을 나눠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렁이 똥=지렁이는 유기물이나 흙을 먹고 항문으로 배설한다. 이것이 지렁이 똥이다. 지렁이가 만들어내는 똥의 양은 하루에 자기 체중의 2배 정도이다. 2g의 지렁이가 들어있는 토양에서 하루 4g씩 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기물이나 흙이 지렁이의 장을 통과하는 시간은 먹이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3~24시간이다. 지렁이 똥은 토양 표면에서 많이 발견되지만 실제로는 지렁이들이 기어다니는 땅 속의 지렁이 굴에 80%, 표면에 20% 분포한다.
시중에서 파는 양식 지렁이류는 유기물을 주로 먹는데 소화율이 낮은 편이다. 먹은 유기물의 20% 정도만 소화되고 나머지는 그냥 잘게 부서져 몸 밖으로 배출된다. 이 과정에서 먹이의 표면적이 수천배 커지는데, 이는 곰팡이·박테리아 등 미생물이 달라붙을 수 있는 공간을 그만큼 늘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지렁이가 배설한 유기물은 주변의 일반 유기물보다 더 잘 분해되고, 작물이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성분은 어떤 유기물을 먹었느냐에 따라 차이가 많은 편이다.
붉은색의 야생지렁이는 유기물보다 흙을 많이 먹는다. 이때 배출하는 똥은 작물의 몸을 구성하는 질소와 탄소 함량이 매우 높고, 칼슘·마그네슘·칼륨·나트륨·망간 등 무기양분도 풍부하다. 특히나 지렁이의 몸 속을 통과하면서 무기양분들이 수용성으로 변해 작물이 편하게 먹을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비타민과 아미노산은 효소와 식물호르몬을 자극해 작물 생육을 활발하게 한다. 마디 배쪽의 구멍을 통해 몸 속 효소를 직접 분출, 흙과 똥의 성분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흙을 먹고 배설한 지렁이 똥은 떼알 구조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유기물을 먹었을 때는 알갱이가 뭉치지 않고 부슬부슬하게 부스러진 홑알 구조로 배설되지만 흙을 먹으면 작은 알갱이가 뭉쳐 있는 형태가 된다. 큰 떼알은 길이가 1㎝에 이르기도 한다.
떼알구조는 물빠짐과 비료성분·수분을 보유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등 토양의 물리성을 좋게 한다. 떼알은 미생물 혹은 작물뿌리에 의해서도 형성되지만 지렁이가 만드는 떼알이 단연 우수하다. 지렁이 몸 속을 거치면서 알갱이들이 강하게 달라붙어 내수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가 잦거나 물대기를 지나치게 하면 떼알이 많이 파괴되는데 지렁이 떼알은 웬만해서는 물에 풀어지거나 녹아내리지 않는다.
떼알 사이의 틈은 작물의 잔뿌리가 뻗어 나가거나, 선충 등 작은 동물들이 붙어사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들 벌레는 입고병 등의 병원균을 잡아 먹는다. 또한 유화수소를 흡착하기 때문에 악취를 없애는 효과도 있다.
◆지렁이 오줌=지렁이는 몸표면이 항상 끈적끈적하게 젖어있는데 이는 몸 속 대사활동의 산물(오줌)인 점액을 등을 통해 내뿜기 때문이다. 끈적끈적한 주성분은 질소질 비료의 주성분인 암모니아여서 작물에 많은 영양분을 공급한다. 이 밖에도 각종 효소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다른 미생물의 활동과 번식을 조장하는 역할도 한다.
약리작용과 살균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한방에서는 지렁이를 지룡(地龍)이라고 부르는데 담석을 녹여 빼내는 약이나 혈액순환 개선제 등의 원재료로 쓰인다. 또한 지렁이 오줌은 중국에서는 피임약으로 쓰일 정도로 살균력이 대단해 병원균의 증식을 억제한다. 토란 등을 저장할 때 지렁이를 넣으면 부패균의 활동이 억제돼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지렁이 굴=지렁이는 항상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위아래, 앞뒤로 굴이 파지는데 빗물의 침투량을 5~8배 늘릴 정도로 물리성을 향상시킨다. 지렁이 굴의 벽면에는 지렁이가 뿜어내는 오줌이 도배를 한 것처럼 많이 묻게 된다. 이 오줌의 영양분과 살균력 덕분으로 작물 생육에 유리한 미생물들이 지렁이 굴에 모여들고, 또 이들을 잡아먹는 벌레와 작은 동물, 토착천적들이 늘게 된다. 생물 다양성을 좋게 하는 것이다.
공극과 양분이 풍부하기 때문에 아조토박터라는 호기성 질소고정균도 늘어난다. 아조토박터는 공기 중에 날아다니는 질소 성분을 붙들어 작물이 이용할 수 있는 비료성분으로 만들기 때문에 토양은 한층 비옥해진다.
또한 지렁이 굴은 미생물이 묻은 유기물이나 흙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토양 활성 범위를 넓히는 기능도 담당한다.
◆죽은 지렁이=지렁이는 죽어서도 땅을 위한다. 즉석에서 비료효과를 볼 수 있는 단백질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지렁이를 말리면 전체 성분의 약 56% 정도가 단백질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무기성분과 비타민으로 구성돼있어 작물 생육에 많은 도움을 준다. 게다가 지렁이가 죽으면 몸 속의 강력한 소화효소가 자기 몸을 녹여 흡수를 더욱 좋게 한다. 지렁이 한마리가 죽으면 대략 10㎎의 질산태질소가 얻어지는데 여기에 지렁이 똥과 오줌에서 비롯된 양분까지 더하면 화학비료나 퇴비를 추가로 전혀 주지 않고도 작물 재배가 가능하다. 닭 사료에 지렁이를 섞어주면 고단백 달걀을 얻을 수 있다.
◆미생물 퇴비와 지렁이 퇴비=시중에서 파는 퇴비는 대부분 미생물을 접종해서 고온 발효시킨 것이다. 그러나 지렁이 퇴비(분변토)는 지렁이가 흙과 유기물을 먹고 배출한 것이므로 차이가 크다. 칼슘과 인산 함량이 높고 이물질 없이 유기물이 아주 고르고 미세하게 부서져 있는 것이 지렁이 퇴비의 특징이다. 지렁이 퇴비의 중요한 효능 중 하나는 토양 중화 기능이다. 각각 산도(pH)가 5.0과 9.0인 강산성 토양과 강알칼리성 토양 100g에 지렁이 퇴비를 60g씩 섞고 산도를 다시 측정해보니 7.1과 7.3으로 교정되었다는 시험 결과도 있다.
◆지렁이를 증식시키려면=지렁이가 좋아하는 유기물을 토양 표면에 덮어줘야 한다. 밭을 갈지 않는 것이 지렁이 생육에는 이상적이지만 어려운 일이므로 작물을 심는 부분만 부분갈이하는 것이 좋다. 수분을 60~70%에 맞추고 마르지 않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