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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이 없다. 다 더위 때문이다. 안 그래도 짜증만 나는 날씨에 입맛까지 떨어지니 하루 종일 인상만 구겨진다. 하기야 학원 근처 식당마다 다녀 봐도 딱히 입맛 당기는 게 없다. 화학조미료를 너무들 많이 쓴다. 그러니 매식으로 입맛 찾기는 아이 열 낳은 아낙네 속곳 훔치기보다 어렵다. 잉걸아빠가 사는 동네에서 자동차로 십 분 정도 달리면 유명한 백운호수가 있다. 이즈막에는 호수 언저리에 '라이브카페'들이 줄지어 늘어섰지만 아직은 조미료 덜 쓰는 맛집이 더 많다. 그러나 대부분 값이 만만치 않다. 물론 싸고도 맛있는 보리밥집이라든가, 잘 찾아보면 있지만 때마다 나들이하기는 어렵다. 그저 집에서 해먹는 음식이 최고다. 나는 <오마이뉴스>에서 음식과 관련된 기사를 검색해본다. 한 수 배워 직접 해먹어 보려고 말이다. "진짜 이 아줌마들 대단한 사람들이네. 어쩌면 이렇게 군침 당기게 글을 쓰나? 음식 잘 하는 아줌마들 죄다 여기 모인 모양이야. 하기야 예쁜 마누라는 내쳐도 음식 잘 하는 마누라는 못 내친다는 옛말이 있기도 하지. 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데 욕실에 있는 줄 알았던 아내가 어느새 옆에 와 서 있다. 어째 눈초리가 수상하다. 입맛 좀 살리려던 잉걸아빠, 엉뚱한 사고를 치다 "그깟 호박잎에 호박전, 막장에 풋고추 찍어서 밥 한 그릇 뚝딱? 그게 무슨 일품요리야?" "그깟 호박잎? 당신 뭘 모르는군. 정성과 사랑이 일품이잖아. 모르겠어? 이 사람들 글 쓴 거 봐. 때마다 가족에게 뭘 해먹일까 고민하는 흔적을 말이야. 뭐 특별한 음식이나 궁중요리 쯤 돼야 일품요린 줄 알았어?" 가족에게 뭘 해먹일까 고민하는 흔적이 어쩌고, 정성과 사랑이 어쩌고 한 말이 아내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흥! 나도 집에서 살림만 했어봐. 때마다 반찬 갈아 대는 게 대수였겠어? 가족 생각 안 하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리고 때마다 뭘 해먹일까 고민하는 거, 왜 여자만 해야 돼? 남자는 좀 하면 안 돼?" 동갑인 아내는 보통 내게 말할 때 반말과 높임말을 적당히 섞어 쓴다. 반말로만 물음표를 매달 때는 심사 한 구석이 단단히 틀렸을 때다. 그럴 때는 그저 끙, 하고 밖으로 나가면 되는데 되룽거리기 좋아하는 잉걸아빠가 그만 아내 심사를 아예 꽈배기로 만들어 버렸다. 잉걸아빠 더위 먹었나? "당신이 집에만 있었으면 잘 했을 거라고? 어이구,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 나보다 음식 잘 못 하잖아. 아니야? 바쁘다는 핑계로 정성도 없고, 그냥 대충대충, 더구나 내가 더위에 입맛 떨어져 기운 못 차리는 거 알면서 좋아하는 것 좀 알아서 해주면 안 되나? 나 요즈막 하루 네 시간도 못 자면서 일 하는데 경찰 불러! 내 말이 틀리는지." 그저 한소끔만 대꾸를 참았으면 좋을 일을, 기어이 아내 부아를 지피고 말았다. 감당도 못하면서. "당신, 정말 양심도 없는 사람이야. 내가 누구 때문에 밖으로 돌아다니는데? 누구 때문에 음식 만들 시간조차 없는데?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돼서 친구 빚보증으로 길거리 나앉을 뻔 했을 때 누구 덕에 해 가렸는데? 온글닷컴인지 깨진글닷컴인지 논술사이트 한다고, 사방팔방 돈 얻어다 주고 뒷갈망하는 게 누군데? 그냥 학원이나 국으로 다녔으면 벌써 부자 됐지, 생전 해보지도 않던 일 이리저리 벌려 나 피 말린 게 누군데?" 주둥이만 싼 잉걸아빠, 기어이 벌집을 잘 못 쑤셨다. 자기 분에 겨워 아내는 어느새 눈시울이 지룩하다. 늦게나마 심각한 사태를 깨닫고 꽁지를 내려 보지만 때는 늦었다. 그저 이럴 때는 일단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게 수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비겁한 줄행랑을 치려다가 뒤돌아보니 아내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 애만도 못한 잉걸아빠! 아내 고생 시키는 잉걸아빠, 주리를 틀라
사실 아내는 남들만큼 음식을 한다. 꽤 여러 가지는 잉걸아빠 혓바닥을 꼼짝 마라, 할 정도로 잘 한다. 온갖 잡채 종류, 제육볶음을 비롯한 각종 볶음 종류, 김치찌개는 기본이고 각종 찌개류, 각종 샐러드, 생선 졸임, 비빔국수, 그러고 보니 세는 일이 오히려 민망하다. 특히 콩나물비빔국수는 정말 일품이다. 문제는 음식 만들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이집 저집 다녀야 하는 영어 선생이다 보니 집에서 편하게 땟거리 걱정할 짬이 없다. 모든 게 다 잉걸아빠 때문이다. 그런데도 죄 없이 고생만 하는 아내에게 괜한 짜증을 부려 눈물 뿌리게 만든 잉걸아빠는 주리를 틀어도 단단히 틀어야 한다. 아무튼, 작은 소란이 일었던 밤이 가고 아침이 되었다. 일부러 밤새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나는 해가 솟는 걸 보고서야 자리에 누웠다. 덕분에 학생들 나눠줄 이런저런 자료는 담뿍 만들었지만 나도 사람인데 속이 편할 리 없다. 점심 무렵 눈을 떠보니 주방에서 아내가 분주하다. 참기름 냄새가 솔솔 나고 구수한 콩나물국 냄새가 진동하는 걸 봐서 분명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콩나물비빔국수다. 원래 잉걸아빠는 밥 내놓고 먹을 정도로 국수를 좋아한다. 특히 고추장 양념에 비빈 국수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한술 더 떠 콩나물비빔국수라니 춤을 춰도 모자랄 판이다. 콩나물비빔국수는 그냥 비빔국수보다 시간과 정성이 더 들어가는 음식이다. 날도 더운데 콩나물 삶아 국물 따로 건더기 따로 냉장고에 넣어 차게 만들어야지, 이것저것 고명거리 미리 준비해둬야지, 가스레인지 앞에서 땀 뻘뻘 흘리며 넘치지 않게 조시 맞춰 국수 삶아야지, 한 여름 불볕더위에 콩나물비빔국수 만들어 먹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쭈뼛쭈뼛 아내 뒤로 다가가자 돌아보지도 않고 한 마디 한다. "내 속 긁어놓고 코만 잘 곱디다. 어서 빨리 씻어요. 거의 다 됐으니까."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괜히 아내 엉덩이를 툭 치고 도망간다. 씻는 둥 마는 둥 한 자리 차지하자 소담스럽게 담긴 국수가 앞에 놓인다. 한 젓가락 얼음에 휘저어 볼이 미어져라 입에 넣자 매콤한 고추장 양념과 구수한 콩나물 냄새가 참기름과 깨소금에 버무려지면서 눈물이 쏙 빠질 지경이다. 사각사각하는 콩나물과 아삭아삭 씹히는 오이 궁합은 또 어떻고? 얼얼한 혓바닥 달래주는 콩나물 냉국을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나는 너무 행복하다.
잃었던 입맛이 한꺼번에 확 돌아오는 느낌이다.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아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고 입을 연다. "천천히 들어요, 체할라. 에그, 우리 남편 먹는 모습 보면 언제 한 번 잘 살 텐데. 당신 기억해요? 당신이 워낙 탐스럽게 먹는 바람에 우리 아버지가 반해서 결혼 허락하셨던 거." 나는 응응, 하며 연신 젓가락질이다. "우리 남편, 이제 철 좀 드시려나?" "무슨 소리! 남자는 철들면 죽는대. 당신, 철난 남편 젯밥 차리는 게 좋아, 아니면 철 안 난 남편 그냥저냥 데리고 사는 게 좋아?" "어이구, 말이나 못하면…. 그냥 드시기나 하셔!" 내 그릇이 거의 비어가자 아내는 자기 그릇에서 내 그릇으로 국수를 옮겨 담는다. "뭐야?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거야?" 그리고 어머니 들으실까봐,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입 모양으로만 미안해! 하고 외친다. 빙긋 웃는 아내 귀밑에 새치 몇 가닥이 보인다. 처음 본다. 나는 국수를 넘기다말고 아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이제 저이도 나이 앞에 별 수 없다. 신나게 먹을 때까지는 몰랐는데 다 먹고 나니 오늘따라 고추장 양념이 너무 매웠나보다. 콩나물 냉국 한 그릇을 더 부탁하고 아내가 뒤돌아 일어선 사이 얼른, 눈물인지 땀인지 훔쳐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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