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경제자문회의 뉴스레터 5호(3.24 발간)에 실린 원장님 글
|
나의 가까운 친구들은 농업경제학자인 나를 만나면 쌀 이야기를 한다. 농업전공자가 아닌 그들에게 농업은 쌀이다. 2005년 도시민 1천명을 대상으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조사한 결과에서도 ‘농업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지’ 하는 질문에 ‘쌀’이라고 대답한 비율이 50 퍼센트를 넘었다. 쌀 시장에 비상이 걸렸다. 2004년 쌀 협상 결과 관세화를 10년 더 미루는 대신에 의무수입량을 늘려주고 그 중 일부는 시중에 밥쌀용으로 팔기로 약속했다.
그 전까지 수입한 쌀은 대개 과자나 술을 만드는 가공용으로 쓰였다. 그런데 올해 4월 초가 되면 미국 쌀이 우리나라에 도착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소비자와 만나게 되어 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지만 전례 없는 일을 코앞에 두고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대형 할인점과 백화점들은 수입쌀을 취급하지 않겠다고 한 발 물러났다. 수입가격과 도매가격의 차액을 부과하여 정부가 흡수하는 ‘마크업’ 때문에 유통업체가 취할 마진이 적기도 하지만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하여 관망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농업과 쌀을 동일시하는 소비자들이 갑자기 농촌사랑과 수입쌀 반대를 같은 반열에 놓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시판될 수입쌀의 비중은 숫자만 보면 그리 크지 않다. 작년에 이행하지 못한 물량까지 금년에 들여온다고 해도 전체 쌀 소비량의 1 퍼센트 정도가 시중 소비자와 만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의 반응은 항상 실제보다 크게 나타났다.
멀리는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결을 전후해서 ‘우리 농촌은 이제 끝이다’하는 사회적 패닉 현상까지 나타났었고, 가깝게는 2001년 쇠고기 수입쿼터제 폐지를 앞두고 수요보다 많은 암소를 도축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작년 쌀 수확기에 벌어진 혼란도 유사한 사례에 포함시킬 수 있다. 작년에는 쌀 생산량과 재고량이 평년 소비량보다 약간 많아서 가격이 다소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수입쌀 시판으로 가격 하락을 우려하거나 현금이 필요한 쌀농가들은 남보다 먼저 쌀을 처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쌀을 사들여서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유통업체들은 시장을 관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귀한 쌀이지만 가격이 떨어질 것으로 전망되니 공급은 더욱 늘고 수요는 더욱 줄어 쌀값이 추가적으로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이러한 사태는 정부가 공공비축용 쌀을 추가적으로 매입할 방침을 내놓으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지금 농민들은 수입쌀이 시판될 것이란 얘기 속에 금년 농사철에 쌀 경작을 계속할 것인지를 저울질하고 있다. 정부로서는 쌀 가격은 시장에 맡기고 떨어지는 소득은 직불제를 통해 보충해준다는 ‘쌀소득보전직불제’ 틀을 유지할 것이다.
이는 쌀 가격을 낮추어 국제경쟁력을 확보한다는 취지이므로 쌀값은 낮아지는 것이 정책의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쌀값이 낮아질수록 재정부담이 늘어나는 것이 문제인데 장기적으로 쌀 생산량이 줄면 해결의 선순환에 들어가겠지만 쌀 외의 소득 작목이 마땅치 않은 농민들로 봐서는 어려운 선택이다.
쌀값은 싼 것인가 비싼 것인가?
한사람이 한 끼 먹는 쌀은 약 120그램, 좋은 쌀 20킬로그램 한 포대는 약 5만원이므로 한 끼에 300원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는 중국산 쌀이나 미국산 쌀에 비해 4 내지 5배 비싼 값이라고 한다. 1ha는 3천평인데 쌀은 약 60가마 정도 생산된다. 좋은 쌀이라면 1천만원 정도 되는 금액이다. 쌀 농사에 들어가는 직접 경비 3백만원을 빼고 나면 7백만원을 자기 노동력과 토지를 제공한 대가로 손에 쥐게 된다. 따라서 한달에 2백만원을 버는 근로자라면 벼농사 1만평과 맞먹는 소득을 올리는 셈이다. 따라서 쌀값은 우리 소득 수준이나 농민 소득을 생각하면 낮은 편이고 외국산과 비교한다면 비싼 것이다.
옛날 배고프던 시절이나, 공산당이 내세웠던 ‘이팝에 고깃국’이 아니더라도 쌀은 여전히 중요하다. 쌀은 국민의 주식이며 환경보전, 홍수방지, 식랑안보 등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다원적 기능들을 수행한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쌀 소비량이 지속적으로 줄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1990년에 국민 한사람 당 한가마 반을 소비했는데, 지금은 한가마로 떨어졌다. 15년 사이에 3분의 1이 감소한 것이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이웃 나라 일본과 대만을 보면 더 적게 소비하고 있으므로 우리 경우도 더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소비량은 주는데 생산량은 줄지 않고 시장 개방으로 수입량이 늘어난다면 경제학이 가르쳐 주는 결과는 자명하다. 가격은 하락할 것이고, 재고는 증가하게 될 것이며, 소득보전직불금은 증가할 것이다. 소비 촉진도 절실하지만 노력에 비해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1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쌀 재협상 결과의 이행이 2014년에 종료되면 관세화로 이행하게 된다. 관세율은 도하개발어젠다 협상이 타결되면 낮춰야 되고 그 결과 외국산 쌀의 국내도착 가격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묶어놓은 소비자 시판 비율도 풀리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쌀 공급은 더욱 늘어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재협상 결과 유예를 연장한 향후 10년은 우리에게 주어진 대응 시한이다. 대안 강구를 자꾸 미루면 경착륙의 충격을 키울 뿐이다.
쌀 재배면적을 줄이고 고유가 시대에 대응한 대체 에너지 작물재배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완전미나 친환경 쌀, 기능성 쌀 등 소비자가 비싼 값을 주고도 사먹는 신제품을 개발하고 수출길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국산쌀을 활용한 가공식품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쌀 소비가 줄고, 공급이 늘어나는 상황을 역전시킬 수 없다면 현실을 직시하고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는 대안을 미리 강구하는 수 밖에 없다. ‘쌀의 중요성’만 되뇌고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