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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3일 오전 08:00

날마다좋은날 2015. 2. 13. 08:00

품성 착취
최기숙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미생〉의 세계와 이면의 삶
지난 학기 대학원 수업 시간에 나는 학생들과 한국고전문학을 대상으로 품성의 가치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우정, 배려, 인내, 성찰. 이런 교과서적인, 그러나 나름대로는 실존적인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선생님의 말씀은 다 맞고 또 중요하지만,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내용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미생〉을 보지 않았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기에, 학생의 우려를 짐작할 수 있었다. 착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순수한 사람이 뒤통수를 맞으며, 전략을 짜지 않고 마음 따라 사는 삶이 손가락질받는 세상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순하게 살다가 손해를 봐서는 안 되겠다는 방어기제 사이에서 갈등하는 학생의 진솔한 질문이었다.

사실, 학생은 정말 답을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다가 손해 보는 사례에 대해 너무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앞뒤가 다른 말을 하면서도 열두 개의 가면을 품 안에 숨기고, 필요할 때마다 능숙하게 꺼내 쓰는 처신의 달인에 대해서도 이미 알 만큼 알고 있다. 그래서 변검(變臉: 중국의 전통극 중 하나. 연기자가 얼굴에 쓴 가면을 순식간에 바꾸는 마술과 비슷한 공연이다)의 배우처럼 얼굴을 바꾸는 기술을 연마해야 하지 않나, 그게 사회생활에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대학에서는 그토록 긴요한 ‘가면의 법칙’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그래서 질문을 한 학생이 결국 도달하게 될 답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 ‘나만 실천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고 또한 감수할 것인가이다.

그날 학생의 질문을 받고 난 뒤로 나는 선과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복선화음’(착한 사람에게는 복이 오고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이 옴)의 ‘복’이 아니라 ‘손해’라고 한다면,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고 나아가라고 말할 권한이 나에게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선택과 실천의 문제일지언정, 타인에게 권고할 만한 자격이 아직 나에게는 없지 않은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의무와 대면하게 되었다.



『삼국유사』, 계집종 욱면이 진신(참된 존재)이 된 이야기
『삼국유사』의 〈감통(感通)〉편에는 「욱면비 염불서승」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욱면이라는 계집종이 염불을 해서 극락왕생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신분제가 뚜렷했던 신라 시대에 신분이 천한 여종이 진신(眞身), 즉 최고지선의 존재가 된다는 내용이다. 여종의 주인은 진신을 발원하는 여종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날마다 산더미 같은 일거리를 주고 일을 마치면 절에 가도 좋다고 했다. 여종은 거뜬히 일을 해내고 절에 와서 발원했다. 손바닥을 뚫어 밧줄로 묶어 합장할 정도로 열심히 정진했다. 그러자 어느 날 하늘에서 불당에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의 격려로 여종이 불당에 들어가 정진하자, 갑자기 몸이 하늘로 솟구쳐 불당의 천장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 연화대에 올랐다.

이 이야기는 기도를 하라거나 불교를 믿으라는 내용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둘러싸고 많은 이견이 있지만, 나는 자신이 믿고 따른 가치를 실제로 실천해서 사람들의 격려와 지지도 얻고, 이상에도 도달한 사례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또 내게 질문할 것이다. “손바닥을 뚫는 고통을 견디면서까지 가치와 선을 실천해야 할까요? 모두가 다 약간씩 이상하고 기이하게 살아가지 않나요? 모난 각을 깎아서 둥글게 하는 게 원만한 삶이 아닌가요?”

질문한 사람은 포인트가 약간 어긋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모난 각을 깎아 원만하게 만드는 방법이 선을 버리고 기괴함을 내면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야 마음이 편하고, 선을 멀리하는 타협선에 대한 면죄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게 된다.

가치와 선을 실천한 대가가 선함으로 갚아지지 않고, 악으로 갚아지는 것은 곤란하다. 그 사회는 잘못된 사회이다. 그러니까 마땅히 선과 가치를 실천하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건 판에 박힌 교과서적인 말이니, 시험을 볼 때만 정답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제안을 해보려 한다.



조금씩 손해 보는 훈련, 존경을 지키는 삶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선함으로 복을 구하려는 태도보다는 조금 손해 보더라도 선함을 행하도록 훈련하려는 태도가 아닐까 하는 게 그것이다. 많이 손해 보면서까지 선을 행하라고 하면 너무 억울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타인에게 강요해서도 곤란하다. 그것은 자율적 선택이 아니라 폭력이기 때문이다.

좋은 가치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선뜻하기 어렵다면, 그것을 먼저 행한 사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존경’하는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사회가 두렵다고 해서 포인트를 ‘착하게 살지 않기’에 두기보다는 착한 사람이 ‘손해 보지 않도록’ 하는 처신에 중심을 두는 변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여기서 ‘착하다는 게 대체 뭐냐’는 근본적인 질문은 하지 않겠다. 누가 봐도 착하다고 동의할 만한 상식적 차원만 고려해도 충분하다).

착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어려운 일을 묵묵히 감수하는 사람을 무시하며, 조용한 사람을 깔보는 사회는 ‘이상한 사회’라고 말하는, 최소한의 입장을 지켜야 한다. 타인을 배려하다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은 덕을 쌓는 것이고, 덕을 쌓는 행위는 우리에게 사람답다는 느낌을 준다. 그 느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예의와 범절은 많이 남아 있는데,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매너는 많이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도 있다. 문제는 언제나 실천이다. 작곡은 하지 못해도 좋은 음악이 무엇인지, 들으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선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천재적인 음악가 모차르트도 처음부터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모차르트도 열 손가락으로 하나씩 건반을 짚으며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를 익혔다. 인문적 실천도 그와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선 나부터 주변에 있는 착한 사람의 품성을 착취하지 말고, 그가 착하고 좋은 사람이니 먼저 보호해 주려는 마음과 행동의 훈련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자연과 환경보다 먼저 보호하고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인간이 만들고 쌓아온 인문적 가치, 선하고 순수한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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