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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렬과 수치는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날마다좋은날 2011. 7. 19. 07:09

졸렬과 수치는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정지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몇 해 전의 일이다. 교양과목 강의를 하는데 뒤쪽에 앉아 강의 시간 내내 옆의 학생과 소곤소곤 잡담을 하는 한 학생이 눈에 거슬려 참고 참다가 마침내 화를 터뜨리고 말았다. 자네 때문에 강의에 집중이 안 되니 그럴 거면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심하게 야단을 쳤다. 그 학생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뒤늦게 큰 실수를 한 것을 알고 가슴을 쳤다. 내가 야단친 학생은 우리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옆 자리의 중국 유학생에게 강의 내용을 설명해주느라 계속 소곤소곤 얘기를 나눈 것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버릇없이 잡담을 하는 것으로 알고 화를 낸 것이었다.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고 옹졸하게 화부터 낸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도저히 치유가 되지 않는 큰 상처를 그 학생에게 주었으니…


무오류의 자기 최면에 빠져 있는 전문가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는 오랫동안 강단에 서왔음에도, 아니, 오히려 오랫동안 강단에 서 왔던 경험을 믿고 섣불리 판단을 했기 때문에,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 오래 종사한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매너리즘과 자만심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수많은 잘못과 실수를 저질러 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가까운 내 친구의 부인은 명망 있는 의사의 오진으로 유방암의 치료시기를 놓쳐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공안사건의 희생자들은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재심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박사학위나 전문의 자격시험, 사법고시 같은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그 분야에서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로서의 전문성과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일수록 실수와 오판을 할 가능성은 더 높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전문가일수록 자신도 인간이기에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며, 또한 실수를 줄이기 위해 학생이나 환자, 피고의 말을 경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일방적으로 비리 재단의 복귀를 결정하여 학내 구성원 다수의 의사를 무시하고 지역 시민들의 여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처사를 보면서 전문가집단의 오만과 횡포에 절망감을 느낀다. G 20 정상회담의 경제효과가 월드컵보다 많은 수백 조이고 평창 동계올림픽의 경제효과가 수십조라고 나팔을 부는 경제전문가들, 원자력이 가장 깨끗하고 값싼 에너지라고 강변하는 원자력 과학자들, 공정보도를 외치면서 도청을 일삼는 언론들. 전문성을 방패삼아 무오류의 자기 최면에 빠져 있는 전문가집단은 결코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줄 모른다.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얼마 전 7년간의 한국 생활을 끝내고 위독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출국하는 독일인 교수가 환송 회식 자리에서 그 동안의 한국 생활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았다. 한국 소설의 독일어 번역 감수 일을 맡아본 그는 왜 한국 소설에는 돈 얘기가 그리 많으냐고 의아해 했다. 대학생들의 꿈이 왜 돈 벌어 아파트 사고 차 사고 하는 일뿐이냐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여학생들이 야외에서 곤충이나 벌레를 만나면 꺄악 소리를 내며 쇼크상태에 빠지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다른 동물이나 곤충과 함께 살아간다는 평범한 사실을 왜 받아들이지 못하느냐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도 몇 년을 산 그는 남한 전체 인구의 반이 몰려 있는 서울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원자력 발전소가 안전하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경산에 살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논을 가까이 두고 볼 수 있던 것이라고 말했다. 봄철에 파릇한 모를 심어 한 여름 장맛비와 무더위 속에 시퍼렇게 자라 가을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보면 눈이 즐겁고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힘들고 짜증날 때 치렁치렁하고 파릇파릇한 무논을 보며 희망과 위안을 찾았다니, 아무 거리낌 없이 무지막지하게 논을 까뭉개고 집을 짓거나 길을 내는 포크레인의 심성을 가진 사람들은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짜증을 돋우는 장마철의 무더위 속에서, 김수영 시인이 「절망」이라는 시를 지은 심사를 곰곰이 헤아려본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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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정지창
· 영남대학교 독문과 교수
· 전 민예총대구지회장
· 저서 : <서사극 마당극 민족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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