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불교
불교를 이해하는 데는 이 중도를 반드시 이해 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중도라는 것은 일상적인 상식으로는 절대로 이해가 어렵다.
우리가 이 중도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대승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승불교가 곧 근본불교인데 그 근본 내용이 중도이기 때문이다.
중도를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대승을 이야기하면 자연히 말은 대승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소승을 이야기 하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것은 일상적인 이해로서는 안 되는 것인데 일상적으로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논리로 말하다 보면 그것은 다름아니 소승불교가 되고 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기이다.
부처님의 연기는 중도 연기인데 사실상 연기를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소승의 시간을 전제로한 유부적 윤회가 되고 만다.
그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역시 성철스님의 `백일법문`과 `영원한 자유`를 또 권할 수 밖에 없다.
긴 얘기가 안 되게 한가지만 경증을 들까한다.
"가전연아.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집(集)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없음(無)이 없다.
가전연아.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멸(滅)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있음(有)이 없다."
[남전대 제13권,상응부경전2 가전연경]
이 말은 간단히 말해서 불안(佛眼)으로 본 세간 즉 제법은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중도이고 연기라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만법의 참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상식으로 이해가 될까?
위의 원시경전에서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대승경전인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과 꼭 같은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이나 공즉시색이라고만 하면 될 것을 부처님께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거듭 꺼꾸로 말씀하신 것은, 말하자면 물질이 변하여 공(空)이되고 공이 변하여 물질이 된다고 잘못 이해할까봐 거듭하여 꺼꾸로 또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중도연기를 말씀하신 것과 조금도 다름이 아닌데 그 말인즉, 색 그대로가 공이고 공 그대로가 색이라는 것이다. 즉 즉 즉......즉해 있다는 말이고 이것이 중도이고 실상이고 참 모습이라는 것이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라든지 물이 얼어서 얼음이라든지 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렇게 되면 유부적 즉 소승의 견해가 되어 버리고 중도라는 것은 결코 그런 말이 아니다.
중도라는 것은 얼음 그대로가 물이고, 물 그대로가 얼음이라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의 말이 그 말이고 그 앞의 경증에서의 말이 그 말이다. 반드시 우리가 수행해서 깨닫지 않으면 절대로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불성을 아미타불이라고 하는데 [정토삼부경] 가운데 [관무량수경]의 끝부분에 이것을 법계장신(法界藏身) 이라고 한다.
이것은 법계에 변만해 있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감추어진 몸(藏身) 이라는 것은 변만해 있는 그대로 이지만 중생이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색즉시공에서 공이 색이고 색이 공인 것이 이사무애이고, 색이 공이기 때문에 색과 색이 걸림이 없는 것이 사사무애이다.
의상스님의 [법성게]의 마지막 부분에 실지로 깨달아서 `궁극의 중도상에 앉으니 예로부터 부동하여 그 이름이 부처라 하도다`이렇게 읊고 계신다. 그것은 곧 중도란 불성이란 말이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자재하다.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성철 큰 스님께서는 `영원한 자유`에서 과학의 4차원을 예로 들었다.
성철스님 께서 과학의 4차원을 말씀하신 것은 과학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마치 부처님께서 당시에 현실에 맞게 고와 낙을 들어서 설명하신 것과 같다.
4차원이론은, 가령 금고의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물건을 넣었다 꺼냈다하는 것이고, 여기 앉아서 다른 어디에서도 존재하는 것이고 현재이면서 과거이고 또한 미래라는 이론이다. 금고를 과학기술로 순식간에 변화시켜서 그런것이라면 그것은 즉한 중도가 아니라 다만 그것을 응용한 것일 뿐이다. 금고가 본래로 곧 공(空)이 아니면 절대로 이것은 제아무리 부처님이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본래로 공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보면 그것이 가능하다. 이것을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과학에서는 이제와서야 그것을 이론적으로 알아냈다. 그렇지만 그것이야말로 그것이 본래의 참 모습이라는 것이다. 과학이 만든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을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이라고 한다. 소립자나 힉스도 아니 에너지도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무한한능력을 본래로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화엄경]에서는일진법계라고 한다.
지구가 허공에 떠서 하루에 자동차로 지구를 한바퀴 도는 속도로 돌고 있다. 그런데 저 바닷물이 쏟아져서 허공밖으로 달아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수 많은 사람들이 서양에서는 불태워 죽임을 당한 것은 우리가 많이 아는 사실이다. 지금이야 인공위성이 돌고 있으니 삼척동자도 안 믿는 것이 모자라는 사람이지만 그것이 상식이 되는데는 20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일체가 마음이며 이것은 있고 또한 없는것 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소승이 출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용수가 근본불교를 복구한 것은 선종의 깨달음의 안목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중도사상을 바로 가져야만 불교를 이론적으로나마 조금은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사가 둘이 아니며 유무가 둘이 아니며 선악이 둘이 아니며 시비가 둘이 아니며 부처중생이 둘이아니며 찰라와 영원이 둘이 아니며 동시에 또 한 이 모두가 둘이라는 것을 이해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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