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
陽明學
명나라의 왕수인(王守仁, 호는 陽明, 1472∼1529)에 의해 주창된 유학의 한 계통.
왕수인은 송의 육구연(陸九淵)과 명의 진헌장(陳獻章)의 심학(心學)을 계승하고, 격물궁리(格物窮理)를 추구하는 주희(朱熹)의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인 이학(理學)과 대립하는 간명직절(簡明直截)한 심학을 완성해 치양지학(致良知學)을 창조하였다.
1. 일원론
왕수인이 28세에 급제해 관리가 되고, 중앙 정부의 부패와 맞서 싸우다가 용장(龍場)으로 귀양가는 등,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깨친 것이 바로 그의 심즉리(心卽理) 사상이었다. 이것을 흔히 용장의 오도(悟道)라고 하는 바, 그의 나이 36세 때의 일이다.
주희가 존재(存在)와 심성(心性)을 이기(理氣)로 이원화하는 데 반해 왕수인은 이는 기의 조리(條理)요, 기는 이의 운용(運用)이라며 이즉기(理卽氣)로 일원화한다. 또, 주희처럼 마음의 이와 사물의 이를 서로 응(應)하는 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마음이 곧 이라며 상즉(相卽)하는 관계로 파악하였다.
왕수인은 마음이 곧 이(理)라는 논리에서 이의 외재성을 완전히 부정, 마음을 떠나 이가 없고(心外無理), 마음 밖에 사가 없다(心外無事)는 이론을 세웠다. 주희에게 있어서는 이는 태극이고, 이 태극이 만물의 개체에 각각 내재함으로써 그것들의 본성을 이룬다.
이에 반해, 왕수인에게 있어서는 이가 곧 마음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사물은 마음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유심론에 귀착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의 일원론(一元論)은 일체의 존재가 마음에 섭수(攝受)되는 심론(心論)으로서 성(性)을 이로, 마음을 기로 보는 주희의 성즉리(性卽理)·심즉기(心卽氣)설과는 대립적 색채를 띠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결과로 지식과 실천에 관해서도 지식이 선행하고 실천이 뒤따른다는 이른바 선지후행적(先知後行的)인 주희식의 주지주의를 배격하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였다. 지행합일설은 심즉리설 이후 2년 만에(1510) 제창되는 학설로서 이 역시 마음이 곧 이라는 기반 위에서 성립되는 이론이다.
그는 지행합일에 대해 지와 행은 마음을 주체로 하기 때문에 지는 심지(心知)가 되고 행도 심행(心行)이 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일념의 발동처가 곧 행이라는 것이다. 지식과 실천은 심을 주체로 하여 성립되기 때문에 지의 주체나 행의 주체가 모두 심에 의하여 통일되는데, 그러한 주체를 그는 양지(良知)라고 보았던 것이다.
양지는 지행의 주체로서 스스로 결단하고 판단하는 영명(靈明)이라고 하였다. 그가 격물(格物)을 주희처럼 객관적인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고, 양지를 실천적으로 바르게 한다고 해석한 것도 주체로서 양지가 우리에게 본래부터 내재해 있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전습록(傳習錄)』에서 주희의 즉물궁리(卽物窮理)에 대해 이렇게 비판하였다. “주희의 이른바 격물이란 것은 즉물하여 그 이를 궁구하는 데에 있으며, 즉물궁리는 곧 사사물물(事事物物) 위에 나아가 이른바 정리(定理)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마음으로써 사사물물에 나아가 그 이를 구하는 것인데 마음과 이(理)를 쪼개어 둘로 한 것이다.”
왕수인의 오도는 『대학(大學)』의 격물(格物)을 화두로 한데서 이루어진다. 바깥의 사물에 나아가서 그 사물의 이치를 찾는다는 주자학적 궁리법을 열심히 궁구하다가, 마음이 곧 리인데 밖에서 천리(天理)를 찾음은 잘못이라고 깨우치고, 마음의 체인 양지(良知)를 이루면 그것이 격물이라고 갈파했던 것이다.
양지는 자가준칙(自家準則)이기 때문에 의념이 머문 곳(이것이 이른 바 物이다)에 따라서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른 것으로 알면, 조금도 기만을 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양지에 의지해 가기만 하면 선은 보존되고 악은 제거될 것이라는 것이 왕수인의 격물 대의다.
격물은 궁리가 아니라 마음의 부정(不正)을 바르게 잡고, 위선거악(爲善去惡)하는 데 본의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왕수인의 견해는 마음과 리가 둘이 아니라는 사상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신(身)·심(心)·의(義)·지(知)·물(物)이 격(格)·치(致)·성(誠)·수(修)로 단계적 순서로 닦아져 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는 성의, 정심으로 통일을 이루는 간이한 이론이 세워진다.
격물에서의 물(物)은 심(心)의 물인 까닭에 정심(正心)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격물은 정사(正事)·정물(正物)이고, 위선거악일 뿐이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구별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2. 치양지설
중국 철학 사상사에서 볼 때 양지(良知)를 처음 제출한 사람은 맹자(孟子)였다. 지(知)를 주희는 대략 식(識)으로 인식한 데 반해, 왕수인은 맹자의 용어인 양지로 보고, 이것을 지식이 아닌 형이상적 심(心)의 본체로 삼았다.
맹자에서 양지는 양능(良能)으로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인간의 선천적 인식 능력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만인이 다 같이 갖는 하나의 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맹자의 양지는 왕수인에 이르러 단순한 것이 아닌 매우 복잡한 구성 원리를 가지면서 다의성을 갖고 마음의 본체로서 정립된다. 『전습록』에는 양지에 대한 설명이 수 없이 많지만 하나하나 개념적 특성이 뚜렷한 것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천리(天理), ② 조화의 정령(造化之精靈), ③ 천식영근(天植靈根), ④ 허령명각(虛靈明覺), ⑤ 시비지심(是非之心), ⑥ 도(道), ⑦ 진성측달(眞誠惻怛), ⑧자가준칙(自家準則), ⑨ 확연대공(廓然大公), ⑩ 적연부동(寂然不動), ⑪ 시금석(試金石), 지남침(指南針), ⑫ 태허무형(太虛無形), ⑬ 역(易), ⑭ 유행의 기(流行之氣), ⑮ 실리(實理).
{{#204}}성(誠), {{#205}}미발지중(未發之中), {{#206}}소명영각처(昭明靈覺處), {{#207}}명사(明師), {{#208}}명경(明鏡), {{#209}}도심(道心), {{#210}}심지본체(心之本体), {{#211}}본래면목(本來面目), {{#212}}규구(規矩), {{#213}}항조자(恒照者), {{#214}}조심(照心), {{#215}}지선(至善), {{#216}}영명(靈明)
이상에서 볼 때 왕수인의 지, 즉 양지는 인간의 단순한 지식이나 인식 능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 원리와 실천의 원리 전체를 함유하는, 실로 폭넓은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왕양명의 양지는 첫째로 진성측달[仁], 시비지심이란 면에서 공자의 인과 맹자의 사단(四端)을 포섭하고 있고, 둘째로 성, 도심, 미발지중, 천리란 면에서 보면, 『중용』과 『대학』 등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을 뜻하며, 셋째로 태허무형, 유행의 기란 점에서는 장재(張載)의 일기(一氣)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또한 넷째로 적연부동, 역이란 면에서는 주역에서 말하는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으로서의 태극, 즉 생생의 이를 의미한다. 이것은 천지만물을 양지의 생출(生出)로 보는, 이른바 그의 조화의 정령을 세우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로 허령명각, 소명영각처, 명경, 조심, 항조자, 본래면목 등은 중국 화엄 사상 및 선종 사상의 맥을 잇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섯째로 선가(仙家)의 허와 불가의 무를 양지의 허, 양지의 무로 교묘히 결합하고, 특히 선가의 신(神), 기(氣), 정(精)을 양지의 묘용(神), 유행(氣), 응취(精)로 보아 하나로 통일하고 있다는 것은 왕수인이 선가의 사상까지도 양지에 흡수시키고 있다 하겠다. 실로 유·불·도 삼교의 핵심 개념들이 양지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왕수인은 「상산문집서(象山文集序)」에서 육구연과 그 자신이 맹자의 심학(良知學)을 정통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의 양지 학설에서 풍기는 에토스는 삼교 융합적인 면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점이 그의 심학(心學)의 한 독자성이라면 독자성일 것이다.
『전습록』 권하의 진구천록(陳九川錄)에 의하면 왕수인이 치양지를 제출한 것은 1520년으로 그의 나이는 49세 때였다(연보에는 다음해인 50세로 되어 있다.). 이즈음 그는 전진 속에서 나날을 보내며, 산중의 적(賊)보다는 심중의 적을 파(破)하기가 더욱 어렵다고 고백하면서 양지의 영명성을 거듭 확인, 치양지를 주창하게 되는 것이다.
치양지의 치(致)는 복득(復得)과 확충(擴充)을 의미한다. 복득은 회복을 뜻하고, 확충은 전후좌우로 넓혀감을 의미하는 것이니, 사욕이 장애가 되어 잃어버린 양지(천지의 본체)를 회복하고 이를 크게 넓히고 키워 가는 것이다. 양지를 이룬다는 것의 본뜻이다.
왕수인에게 양지는 선악 시비의 판단 능력이고 천리 자체로서 인간의 심의 본래의 모습이다. 또한 이 양지는 흐르는 기라고도 말할 수 있으니 시처(時處)에 의해서 변화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확대되면 우주의 생명력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중국 유학 사상 마음을 이처럼 우주적 본체로 개념을 고양시켜 존재 원리로 정초(定礎)시킨 것은 왕수인이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심즉리의 구조에서 보면 이(理)란 외부로부터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양지대로 실천하고 행동하면 이는 바로 거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 뒤 태주학파(泰州學派)인 이른바 양명좌파는 양지란 바로 눈앞에 드러나 있다는 양지현성설(良知現成說)을 발전시켰다.
양지의 현성을 믿고 그것을 최대한 발휘한다면 사욕은 소멸될 것이며, 희로애락(喜怒哀樂) 등의 감정은 본래 우리에게 구비되어 있으므로 그것의 자연스러운 발로가 양지의 작용이라면서, 양지는 선(善)이라 하면서 칠정(七情)을 악(惡)이라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또한 단지 칠정에 고착해 집착한다면 그것은 욕(欲)이 되어 양지는 은폐되고 만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 제자가 “부모가 돌아가신 날에 호곡(號哭)하는 것은 마음의 본체인 낙(樂)을 손상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질문하자 왕수인은 “그 때 크게 곡한 뒤에 낙의 경지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한 번 호곡하지 않는다면 본래인 즐거움의 경지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와 같은 왕수인의 태도는 송나라의 주지주의나 엄숙주의와 다른 점이 있다. 그리고 그의 양지는 성(性)·정(情)·의(意)를 모두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3. 발본색원론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이란 사욕을 근본으로부터 뿌리뽑고 근원으로부터 막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내용은 첫째, 천지만물은 일체(一體)인데 그것은 천지만물일체(天地萬物一體)의 인(仁)이며. 둘째, 만인(萬人)은 양지를 공유하고, 셋째, 양지는 영원하여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체(仁體)로써 천하를 교화하고 사욕을 극복하며 그 폐단을 제거해 본래의 마음을 회복함으로써 대동(大同)의 세계가 전개된다고 하였다.
이에 왕수인은 53세 경에 “대저 발본색원의 논이 천하에 분명하지 못하면 천하의 성인(聖人)을 배우는 학술이 날로 타락하게 되어 인간은 금수와 야만으로 빠지면서도 자기 생각으로는 성인의 학문이라 생각하게 된다.”라고 경계하였다.
4. 사상마련
왕수인은 초기에는 비교적 사욕을 제거하고 천리(天理)를 회복하는 방법으로 정좌(靜坐)를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정(靜)을 좋아하고 활동[動]을 싫어하는 폐단이 있었으므로 다시 일상 생활에서 양지를 마련하는 사상마련법을 창안하였다. 이것은 곧 양지의 생활화로써 사욕을 간단없이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 선비는 마음을 기를 때에도 사물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불교는 허적(虛寂)에 빠져서 세속과 교섭이 없게 되었다. 이것은 불교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없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상마련(事上磨鍊)은 왕수인의 실천적 행동 철학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이론이다.
5. 만가성인
정호(程顥)가 만물일체의 인(仁)을 주장하고, 왕수인 역시 그것을 계승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주체성 존중과 만민평등의 대중적인 학문이 발전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 존중 사상 또는 민중 존중 사상은 유교 정신의 혁신적인 계승이라 할 수 있다.
밖에서 돌아온 왕간(王艮)에게 왕수인이 “거리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묻자 왕간은 “온 거리의 사람은 모두가 성인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왕수인은 다시 “상대방도 자네를 성인이라 보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양명학 좌파들에게 실천적으로 계승되어 목수·나무꾼 등에게까지 확대되었고, 이러한 양지학의 대중화는 중세의 신분 주의에 대한 타격이 되었다.
태주학파의 하심은(何心隱, 원명은 梁汝元)과 그를 숭배한 이지(李贄)의 사상은 우리 나라 양명학파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심은은 취화당(聚和堂)을 만들어 종족연합체(宗族聯合體)를 구성하고 공동 생활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원리를 신(信)으로 하였다. 벗 사이의 신은 군신 사이의 의리와 표리가 된다고 하였다.
이에 이지는 『분서(焚書)』「하심은론(何心隱論)」에서 “인륜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양여원은 그 중 네 가지를 버리고, 다만 몸을 사우성현(師友聖賢) 사이에만 두었다.”라고 하면서 의(義)·친(親)·별(別)·서(序) 등은 상하 관계의 종적인 윤리이므로 버리고, 스승과 벗 사이의 신(信)은 횡적인 윤리이므로 취한 것이라 하였다.
또 이지의 「동심설(童心說)」도 우리 나라 양명학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동심설」 첫머리에서 “동심이란 거짓을 버리는 순진한 것이고, 최초 한 생각의 본심(本心)이다.”라고 해 절가순진(絶假純眞)을 주장하였다.
동심은 본심을 말하지만 또 양지를 의미하므로 “그 사람이 이미 거짓이면 거짓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해 가인(假人)·가언(假言)·가문(假文)·가도학(假道學)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또한, 그가 『분서』에서 “정신 능력[見]에 남녀의 구별이 있다고 하겠는가? 남자의 정신 능력은 모두가 훌륭하고 여자의 능력은 모두가 졸렬하다고 어찌 말하겠는가?”라고 한 것은 남녀평등의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왕수인 자신의 핵심 사상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왕수인은 맹자의 양지를 심의 주체로 세워 공·맹에서 논의되었던 심을 형이상학적 위치로까지 고양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둘째 불학(佛學)의 심론을 원용하면서도 이에 유학 본래의 천명, 천도 관념을 접합시켜 일기유통상에서 만물일체관을 확립하였다. 인을 조화생생의 이(理)로 해 양지의 조화정령과 결부시킴으로써 인간의 도덕성과 주체성을 내재적으로 확립하고, 양지의 영명(靈明)을 통해 우주적 질서까지를 확립하려 하였다.
셋째 『대학』의 격물을 궁리가 아닌 치양지로 해석함으로써 사변적인 이학의 학풍을 극복하고 인간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하였다. 넷째 실천론에서 치양지, 지행합일을 통해 주체적 자아 확립과 그 실천을 강조하고 친민 철학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다섯째 왕수인의 학문은 시종일관 성인이 되는데 목표가 있었다는 점에서 심학은 곧 인간학이라 말할 수도 있게 하였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양지론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 의식을 동시에 자각시킴으로써 생동감 있고, 활력에 넘치는 도덕 사회를 구현하는 바로서의 이상을 제시하였다.
[양명학의 수용과정]
1. 동전 연대
우리나라에 왕수인의 『전습록』이 전해진 것은 이미 왕수인이 살아 있을 때로서 1521년(중종 16)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눌재집(訥齋集)』과 『십청헌집(十淸軒集)』에는 그들이 왕수인의 『전습록』에 관해 토론하고 시문으로 그들의 생각을 주고받은 것이 실려 있다.
2. 수용 과정
이황(李滉)과 박세채(朴世采)와 한원진(韓元震) 등으로부터 계속 배척을 받았던 양명학은 남언경(南彦經)과 이요(李瑤) 등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했고, 허균(許筠)과 이수광(李睟光)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은 “지금 남언경에게 배운 사람은 양명을 많이 숭상한다.”고 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이요였다.
유성룡이 선조에게 “이요의 학문은 남언경을 존신합니다.”라고 하자 선조는 “이요는 왕양명과 불교 등 모르는 것이 없고, 또 그는 양명의 격치설(格致說)을 설명한 후 이어서 만일 양명으로 하여금 지금 세상을 다스리게 한다면 왜(倭)를 소탕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유성룡에게 설명하였다.
선조도 “양명의 치양지(致良知)의 본령은 먼저 마음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며, 일마다 타당함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양명학에 동조하였다.
허균은 많은 점에서 양명학 좌파인 이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지의 『분서』를 읽고 이지처럼 유교적인 예교(禮敎)를 반대하며 이지의 「동심설」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허균이 “남녀의 정욕은 천성(天性)이며 성인의 예교는 천성보다 높지 않으므로 어길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나, 「유재론(遺才論)」에서 “하늘이 부여한 재주는 모두 고르게 되어 있는데, 양반과 과거로써 사람의 등용을 한정하니 늘 인재가 없는 병통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고금에 걸쳐, 서얼(庶孼)이라 해서 어진 이를 버려 두고, 어머니가 개가(改嫁)했다 해서 인재로 등용되지 못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라고 한 것, 그리고 그의 「홍길동전」 등은 모두 이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수광의 사상에서도 왕수인과 그 학파의 사상을 넓게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지봉집(芝峯集)』「경어잡편(警語雜編)」에서 “도(道)는 민생의 일용 속에 있으니 여름에 갈옷을 입고 겨울에 털옷을 입고,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것이 곧 도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지가 『분서』「답등석양」에서 “밥 먹는 것이 곧 인륜물리(人倫物理)이다. 옷 입고 밥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윤물(倫物)이란 없다.”라고 한 것과 똑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양명학을 수용한 것은 장유(張維)와 최명길(崔鳴吉)이다. 장유의 『계곡만필(谿谷漫筆)』은 우리 나라 양명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문헌이다. 그는 정주학만을 중히 여기는 우리 나라 학자들은 실심 있는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학문을 한다며, 『계곡만필』에서 이렇게 공격했다.
“양명과 백사(白沙)를 평론하는 자를 아울러 선학(禪學)이라 한다. 백사학은 진실로 정(靜)에 치우쳐 적(寂)으로 흐른 흠이 있었다. 그러나 양명의 양지훈(良知訓)은 공부를 오직 성찰(省察)과 확충에 두고 늘 고요함을 즐기면서 움직임을 싫어함은 배우는 자가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백사학과는 절대로 다르다. 단지 궁리와 격물(格物)을 논한 것이 정주(程朱)와 아주 다른데, 이것은 그 학문의 길을 다르게 세웠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중국에는 학자가 있으나 우리에게는 학자가 없다. 대개 중국 학자는 생각이 넓어 시대마다 뜻 있는 선비가 실심(實心)으로 학문을 닦는 까닭에 각기 좋아하는 것에 따라 학문하는 것이 동일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충실한 공부가 있었다. 우리는 그렇지 못해 생각이 옹졸하고 도무지 지기(志氣)라고는 없고 단지 정주학(程朱學)만 세상에서 귀중히 여기고 존중할 뿐이다.”
『계곡집』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 “대체로 인간의 본성도 이 마음이요 감정도 이 마음이며, 육체도 이 마음이요 생명도 이 마음이며, 천리(天理)도 이 마음이요, 인욕(人欲)도 이 마음이다”라고 한 것은 마음이 곧 천리라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이 인식하는 바가 이(理)다.”라고 한 것도 철저한 심학(心學)의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사상과 행동을 같이한 장유와 최명길이 「논전례차(論典禮箚)」에서 “양지의 천(天)을 하루 아침에 깨치니 엄폐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이나, 심양(瀋陽)으로 가는 길에 아들에게 “학문하는 데 말 많이 할 것 없고, 스스로의 마음 참된 것과 망령된 것을 제 스스로 알라.”라고 한 것은 양지독지(良知獨知)를 노래한 것이다. 「기후량서(寄後亮書)」는 그의 양명학설을 가장 뚜렷하게 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양명학파의 수립]
1. 하곡학파
우리 나라 양명학파가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은 정제두(鄭齊斗, 호는 霞谷)에 의해서다. 당시의 학자들이 주자학을 한다면서 사실은 그것을 영달하는 데 이용하고 파당을 짓는 데 이용했으므로 정제두는 『존언(存言)』에서 이렇게 비판하였다.
“오늘날에 와서 주희를 말하는 이는 주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희에 기탁하는 것이고, 주희에 기탁한 것이 아니라 주희를 부회(附會)하는 것으로 자기 생각을 성취하는 데 주희를 끼고 위엄을 짓고 그 사계(私計)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정제두는 주자학자들이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달과 공리로 흐르는 데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희를 끼고 권위를 짓는 행위가 마치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는 것과 같다며, 학문이 남을 복종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황을 반대하였다. 그것은 당시의 노론과 소론 등 파당 싸움을 배격한 것이다.
① 일원론(一元論)의 관철 : 정제두의 학문은 주자학처럼 이원적인 상응 논리(相應論理)에 의거하지 않고 상즉 논리(相卽論理)에 기초한 일원론이었다.
“내 심성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은 본래 일원(一元)인데, 어찌하여 주희처럼 물리(物理)만 찾다가 도리어 그 본원(本源)을 잃는 것인가.”라고 하면서 하늘과 사람은 심성에 의해 일원화되었으므로 우주와 인생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일원론적 사고에서 이기(理氣)와 성정(性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지(知)와 행(行), 심(心)과 이(理), 모두가 서로 상즉(相卽)하는 관계로 설명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심체(心體)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 이(理)란, 주희처럼 사물의 조리나 이치가 아니라, 내 마음의 양지다. 사물의 이가 그에게는 생명적이며 주체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란 마음의 신묘(神妙)하고 밝은 작용이지 죽은 사물이 아니며, 사물의 소이(所以)로써 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기 또한 이요, 이 또한 기이다. 그래서 왕수인은 양지가 이른바 천리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정제두는 이기 역시 일원적인 것으로 파악하며, 그것은 마음의 이요, 마음의 기이기 대문에 심(心)에 의해 통일되고 있었다.
② 양지론(良知論) : 정제두는 심즉리에 바탕해 양지는 천리요, 천리는 양지라고 양지론을 전개한다. 그는 자기의 이는 내 한 마음에서 찾자는 것이라면서, 주희처럼 객관적인 사물에서 이치를 찾는 이른바 즉물궁리(卽物窮理)가 아니라 내 한 마음을 사물에서 발휘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체적인 양지를 객관적인 사물에서 실현한다고 하였다.
외향(外向)과 내향(內向)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주는 모두가 양지가 현실화된 것이라 보고 그 본래성이 곧 양지라고 하였다.
민이승(閔以升)이 양지도(良知圖)를 보내 오자 그것을 수정해 정제두는 자신의 「양지도」를 완성하였다. 그는 “본래성(體)이란 곧 양지의 본래성이요, 현실성(用)이란 곧 양지의 현실성이다.”라고 하면서, “마음의 본질은 마음의 본연(本然)이요 양지의 체(體)이며, 마음의 감정은 마음의 발현이요 양지의 현실성이다. 따라서 성(性)은 양지의 체요, 정(情)은 양지의 용(用)이다.”고 하였다.
또, “천지만물은 일체이며 틈 사이가 없다(萬物一體無間).”고 하였다. 그것을 요약해 [그림] 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③ 삶의 이(生理) : 정제두는 주희의 이를 물리(物理) 혹은 헛된 조리(條理)라고 반대하면서 자기의 이는 삶의 이[生理], 삶의 도리[生道], 삶의 에너지[生氣]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삶의 이치를 『맹자』에 나타나는 ‘생지위성(生之謂性)’과 『주역』「계사전(繫辭傳)」에 나타나는 ‘천지지대덕왈생(天地之大德曰生)’의 생(生)에 근거를 두었다. 그리고 그의 이는 물리가 아니라 삶의 이라는 의미에서 생리(生理)라 하였다.
그는 “성은 삶의 이치이다.”라고 하고, “이성이란 삶의 이치일 뿐이다.”라며, “성이란 곧 이의 본체요, 삶의 주인이다. 우주의 근원이요 사람의 생명이며, 궁극에 모인 것이며, 만유의 통일이다.
이른바 명(命)이요 성(性)이며, 신(神)이요 심(心)이다.”라고 하면서도 또 “인(仁)이란 삶의 이치의 주인이며, 능히 발현하는 것이다.”라며 생리의 발현이 인이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그의 생리란 이목구비라는 육체와 양지로서의 정신적인 것을 통일한 인간 본성의 규명이라 하겠다.
④ 하곡학의 우경화(右傾化) : 중국의 양명학파는 왕수인이 죽고 난 뒤에 우파와 좌파, 혹은 정통파로 분파되었고, 특히 좌경화한 태주파에서 이지 등의 극좌파가 발생하였다. 정제두도 죽기 5년 전에 『양명집(陽明集)』을 보고 이지 등의 극좌파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이미 양명학 속에 있음을 자각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양명학파가 신분주의를 타파하고 일반 서민대중에 파급된 것과는 달리 정제두에게서는 그러한 혁명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다. 이 점은 그가 만든 가법(家法)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서얼(庶孼)을 눌러 사당에 들어가 적자손(嫡子孫)과 같이 하게 하지 말 것, 둘째 비첩(婢妾)의 무리는 천대하고 첩의 예로 대하지 말 것, 셋째 양반 친척은 한 당이 되고 아랫것들이나 잡된 무리가 이간시키지 못하도록 할 것, 넷째 주인을 높이고 노비를 억압할 것, 다섯째 노비가 어른을 믿고 아이들과 부녀들을 만만히 여기게 되면 뒷날에 노비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니, 양반은 어른이나 젊은이나 모두 한 몸이 되어 처음부터 주권을 행사할 것 등이다.
이와 같은 그의 가법은 왕수인이 내세운 인간의 평등과 존엄 사상을 부인하고 오히려 봉건적 신분 주의를 옹호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당시의 정주학의 허위는 미워했으나 사상적인 혁명성은 없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정제두에게는 양명 우파의 주정귀적(主靜歸寂)이나 실심마련(實心磨鍊)과 맥락이 통하는 주장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학변(學辨)」에서 “무극이면서 태극이라 하고, 주정(主靜)으로써 인극(人極)을 세운다고 하였는데, 그 인극의 도리를 세운 것은 오직 무욕과 주정에 있고, 성인을 배울 수 있는 공도 곧 일자(一者) 무욕에 있는 것이다.”라고, 정호의 『정성서(定性書)』를 인용하면서 천지와 성인의 도는 내외가 없는 『정성서』의 해명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설은 양명의 정통파로 통하는 이재(李材)와 연결된다.
2. 동조자와 하곡 문류
양득중(梁得中)의 절충설을 들 수 있는데, 양득중은 양지(良知)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절충하였다. 그는 “무릇 사람은 양지와 함께 이를 아는 것이니, 반드시 학문이 지극하고 생각이 투철한 뒤에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양지는 인간의 고유성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그는 양지를 자기의 것으로 능히 하지 못한 자는 가인(假人)이요, 그 학문도 헛된 학(虛學)이라면서, 그것은 실사구시 곧 성실(誠實)에 의해 철학적으로 기초된다고 주장한 다. 그것이 그의 본령이었다. 이에 이미 실학과 양지학의 절충이 발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3. 정제두의 문류로서의 강화학파와 학문 경향
정제두가 강화도에서 학문을 하며 양명학을 천명할 때 그의 자손과 이광사(李匡師)·이광려(李匡呂), 손서 이광명(李匡明), 다른 손서 신대우(申大羽) 등의 종형제와 심육(沈錥)·윤순(尹淳)·이진병(李震炳) 등이 모여들어 하나의 학파가 형성되었고, 200년 간 계속되었다.
역사학에서는 이종휘(李鍾徽)가 양지 사관(良知史觀)에 입각해 역사를 파악하였다. 그들은 왕수인의 양지학·심학을 기초로 사학(史學)과 정음(正音)·서예(書藝)·시문(詩文)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양지·정서·의지를 함께 통일한 것이었고, 참된 것을 구하고 헛된 것을 버리는 양지학이었는데 정치관으로 나타날 때에는 진(眞)과 가(假)라는 논리에 의거, 노당(老黨)의 가대의(假大義) 배격을 특색으로 하였다.
그들은 모든 학문에서 양지를 심볼화하고 이미 비인간화한 사회에 도전하면서 실학파와 제휴했는데, 실학파 중에서 특히 북학파는 양명학을 받아들인 자취가 뚜렷하다. 그들의 학문 경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주체적인 양지 사관은 이종휘로부터 시작되어 이광사의 맏아들인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이광명의 아들 이충익(李忠翊)의 『군자지과(君子之過)』, 이면백(李勉伯)의 『감서(憨書)』·『해동돈사(海東惇史)』, 그의 아들 이시원(李是遠)의 『국조문헌(國朝文獻)』 및 그것을 토대로 한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의 업적이 빛나고 있다.
신채호(申采浩)가 이종휘의 사관을 “노예 사상으로부터 주체적 사관을 수립하였다.”고 한 것처럼 그들은 홀로 아는(獨知) 양지사관에 근거하고 공평을 원칙으로 하였다.
② 우리 나라의 언어인 정음(正音)의 연구 또한 주체성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광사의 정음 연구를 이영익(李令翊)과 이충익이 계승하고 정동유(鄭東愈)와 유희(柳僖)가 더욱 발전시켰다.
③ 윤순의 서예는 이광사에 이르러 원교체(圓嶠體)로 창조되고, 이긍익·이충익과 특히 정문승(鄭文升)의 서화는 산수화에 뛰어나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 소개되어 있다.
④ 이광려·이충익·이건창은 모두 이지의 영향을 받은 공안파(公安派)의 성령문학(性靈文學)에 기본을 두고 있다. 신대우의 「이참봉문집서」에 이광려의 글은 성령(性靈)을 발휘했다고 하였으며, 이충익의 「이참봉집서」에 문장됨이 선배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시세(時勢)에 구애되지 않았다고 한 것도 바로 공안파 문장론의 기본이었다.
이충익은 「답한생서(答韓生書)」에서 성령문학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또 글은 반드시 혜식(慧識)을 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혜식은 양지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⑤ 강화의 양명학은 실학과 제휴하였다. 이상학(李象學)은 정약용(丁若鏞)을 연구했고, 신작(申綽)은 정약용과 교우하였다. 정문승은 농서(農書)에, 정후일(鄭厚一)은 수학 연구에 조예가 깊었다. 이들은 양지를 심볼화해 문학, 언어 연구, 서예, 시화에서 혹은 실학에서 그것을 구체화하였다.
이건방(李建芳)은 그의 「원론(原論)」에서 “그 참된 것을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 가(假)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어떻게 그 가임을 아는가? 그 가는 성현의 도에 합당하지 못함을 아는 것이다. 무엇으로 그것이 성현의 도에 합당하지 않음을 아는가? 사람의 정(情)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양지의 발휘인 일진무가(一眞無假)를 말했는데, 이충익도 「가설(假說)」에서 진가론(眞假論)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강화학파에서 일관된 논리였다. 그리고 이건방은 송시열(宋時烈)에 대해, 그는 주희의 권위를 빙자해 오늘 한 사람을 죽이고 이것을 대의(大義)라 하고, 내일 또 한 사람을 죽이고 이것을 대의라고 하는데, 이는 도리어 주희의 죄인이요, 춘추(春秋)의 죄인이라고 비난, 공격하였다.
[양명학과 실학파]
실학파 가운데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 이른바 북학파 혹은 이용후생파의 중심 인물들은 양명학을 통해 사상적으로 무장한 것으로 보인다.
홍대용이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허(虛)와 실(實)의 대결에 관해 말한 것이나 그의 사상 중 대동 사상과 교육 이론은 양명학과 접근되고 있다. 그가 “천지는 하나의 큰 부모와 동포가 되니, 어찌 화(華)·이(夷)의 틈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왕수인이 “천지 만물은 한 몸이다.”라고 한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의 사민평등관(四民平等觀)에 근거한 교육 제도의 주장도 왕수인의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다. 박지원의 한문 소설에 일관된 것은 이지와 공안파의 문학 이론이다. 일상 용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문장법도 이지가 이미 「동심설」에서 주장한 것이다.
「양반전」 혹은 「허생전」에서 허위의 탈을 벗기고 지도자들의 가심(假心)을 폭로하고, 신분주의를 배격한 것은 모두가 「동심설」과 맥락을 같이한 것이다.
그가 글 짓는 것에 대해 『열하일기』「증좌소산인(贈左蘇山人)」에서 “사실대로 짓는 곳에 글의 참 맛이 있는 것이니 하필이면 먼 옛날을 끌어 올 게 무엇인가, 한당(漢唐)은 지금이 아니요, 풍요(風謠) 또한 중국과 다르다.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이 만약에 다시 살아 나온다 하더라도 결코 반고나 사마천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글을 만들어 내기란 비록 어렵다 하더라도 자기의 생각대로 그려내면 그만이지 구태여 옛 법에 얽매일 것이 무엇이냐.”고 한 것도 바로 공안파의 주장이며 이지의 「동심설」이다. 이를 곧 개성적인 성령문학이라 한 것이다.
그는 공안파의 중심 인물인 원중랑(袁中郎)의 문집을 읽고 있었으며, 이지의 『분서』·『장서(藏書)』·『속장서(續藏書)』 등도 독파하고 있음을 그의 「도강록(渡江錄)」또는 「관내정사(關內程史)」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박제가가 「북학변(北學辨)」에서 “중국에는 비록 육구연과 왕수인의 학설이 있으나 주자학의 전통은 제대로 있다. 우리 나라는 사람마다 정주학설만을 말할 뿐 나라 안에 이단이 없으므로 사대부는 감히 강서(江西)·여요(餘姚)의 학설을 논하지 못한다. 그러나 도가 한 길로만 나와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과거라는 울 안에 몰아 넣는 풍속 때문에 구속받으며,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몸을 용납할 곳이 없고 자손마저 보존하지 못한다. 이런 모든 것이 중국의 큰 규모와 같게 되지 못한 요인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이학(理學)보다는 성의(誠意)가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명나라 말 유종주(劉宗周)의 신독(愼獨)·성종심학(性宗心學)과 연결되고 있다.
[양명학과 광복운동]
양명학과 관련된 독립 운동가는 김택영(金澤榮)·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송진우(宋鎭禹) 등이다. 김택영은 양명학자 이건창과 사귀어 성의(誠意)가 격물치지(格物致知)보다 앞선다고 주장하고 주희의 주지주의를 반대하며 양명설에 동조하였다.
박은식은 『왕양명선생실기(王陽明先生實記)』와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 등을 지어 양명학을 천명하였다. 『유교구신론』은 첫째 유교는 종래 민중 사회에 보급하는 정신이 부족했고, 둘째 유교는 교화에 소극적이며, 셋째 주자학은 너무 번거로워 이해하기가 어려우므로 간단절요한 양명학으로 바꾸고자 하는 논의다.
그는 과감한 실천을 더욱 강조해 한국적 양명학을 창도하였다. 그의 『왕양명선생실기』는 양지설과 사상마련·발본색원론·교육론 등의 이론적인 개설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체험한 것을 함께 서술하고 소개한 우리 나라 초유의 양명학 연구서다. 그는 양명학적 입장에서 과학의 비도덕화에 의한 근대 과학의 병폐를 지적하였다.
정인보의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은 양명학 연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저술이다. 이 책의 근본 내용은 조선혼(朝鮮魂)의 환기에 있었다. 한갓 양명학 연구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조선혼인 ‘우리의 얼’을 고취해 광복을 꾀하자는 것이다.
그는 과거 수백 년 간 조선의 역사는 허(虛)와 가(假)가 연출한 자취라고 비난하였다. 조선 수백 년 간의 학문은 오직 유학이었고 또 정주(程朱)만을 신봉한 결과 한편에서는 그 학설을 받아 자신의 편의를 꾀하려는 사영파(私營派)가 생겼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학설을 배워 중화적전(中華嫡傳)을 이 땅에 드리우고자 하는 존화파(尊華派)가 생겨나는 폐단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생을 몰두해 심성을 강론하였지만 실심과 얼러 볼 생각이 적었고, 일세를 휘동(揮動)해 도의를 표방하였지만 자신밖에는 볼 줄 몰랐기 때문에 세상 풍습이 쇠미함에 따라 그 학은 허학(虛學)뿐이었고 그 행동은 가(假)인지라 온 세상에 가득찬 것은 오직 허학이요 가행(假行)뿐이었다고 그는 단정하였다.
그는 또 강화학파를 계승하였을 발견할 수 있으며, 양명학의 주장은 치양지(致良知)라 하고 사물에 나아가 그 이를 궁구하는 방법을 배척하였다.
그가 치양지라 할 때의 치는 ‘이룬다’는 뜻으로 무엇이든지 이루었다 하면, 그 한도를 다한 것이요, 양지라 함은 ‘천생으로 가진 앎’이라는 뜻으로, 천생으로 가진 이 앎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같은 것인데, 그러나 이 앎이 다 같다 해도 버리기도 하고 가리기도 하며, 심하면 아주 분탕해 없어지도록 하기도 하므로 이 앎이 앎답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이루어 놓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양명학의 진수를 설파한 것이라 하겠다. 정인보의 공적은 처음으로 조선 양명학사를 밝혀 놓았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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