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하니 또한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수행자에게 이 물음처럼 널리 관심을 갖는 화두는 없을 것입니다. 무진 머리를 싸매고 그를 풀기 위해 애들을 쓰지만 사실 이러한 화두는 앎과는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그를 온전히 깨닫고 몸과 마음으로 실증해나가기 전에는 그 참된 의미는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주록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나옵니다.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습니다.
모든 것(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萬法歸一, 一歸何處)
조주선사께서 답하셨습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배적삼 하나를 지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나 나가더라.”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심(心,一)과 심상(心想, 萬法)은 불이(不二)이나 그 심상(心想)에 묶여 그 하나(本性, 一心)을 잃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바다는 고요하나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본래 바다의 고요함을 알아채지 못하고 파도에 시선을 빼앗긴 채 파도만을 바라보며 파도치는 바다가 바다의 본래 모습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마음의 현상으로부터 온전히 깨어있지 못하면 이 소식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사량과 분별심의 원초적인 뿌리는 마음이 아니라 실은 몸이 지니고 있는 감각적 현상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바로 몸의 감각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철저히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토대 위에서 진화해왔습니다. 우리는 그 작용을 마음이 보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일체유심조의 입장이지요. 하지만 일심(一心)을 떠난 마음은 실은 몸과 세상과의 교감 작용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철저히 주관적인 감각적 현상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찰나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 묶여있어 사물의 실상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감각에 의존한 마음은 마음의 근원성(一心)에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늘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토대 위에서 몸의 본능에 충실히 적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앎은(일곱근)은 심상(心想)일 뿐 일심에 기초한 것이 아닌 것이지요. 따라서 조주선사는 몸의 감각에 기초한 사량과 분별심에 묶여있지 말고 일심(一心)으로 회귀하라고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 네가 지금 심상(心想)에 묶여서 바라보는 만법, 하나란 내가 지금 말하는 일곱 근이랑
무엇이 다르냐고 넌지시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화두를 또 다른 관점, <존재 즉 관계의 그물망>라는 존재론적 특이성에서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만법과 하나라는 뜻의 의미는 존재세계의 실상을 나타내고 있음에도 존재세계로부터 분리된(그래서 타자화된)인식의 틀로는 그저 이해는 될지언정 그와 일치된 삶의 지평으로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존재 즉 관계의 그물망>라는 현상적 세계의 특이성을 교감하고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세계는 우주 전체가 참여하는 개별자들, 즉 거대 행성으로부터 저 극미의 원자까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있습니다. 그 안에는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개별자들이 원인자이자 동시에 결과자로서 서로 서로 바탕을 이루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지금 이 순간 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서로가 그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진 개별자로서 존재하지만 그 이면에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의 끈으로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법, 즉 무수한 존재의 형상들은 겉으로는 독립된 개별자이지만 실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관계의 결과물들입니다. 그를 보면 그 실상이 바로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법을 이치나 이법, 혹은 일심(一心)과 심상(心想)의 유심론적 관점을 넘어 그 언어의 이면에 숨겨진 무수한 개별자들의 생생약동하는 관계의 그물망 혹은 그 현상적인 존재의 역동적인 에너지의 교환으로 받아들이면 의식의 지평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주라는 포태 속에 존재하는 그 무수한 존재자들의 상생, 상극, 상화하면서 빚어내는 그 존재의 그물망이 바로 법이기 때문입니다.)
저 들에 핀 작은 꽃을 보십시요!
그 예쁜 꽃이 존재하게 되는 그 이면의 실상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그 꽃은 우주 전체가 참여하여 빚어놓은 관계의 결과물, 즉 만법귀일의 실질적인 증거입니다.
우리의 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를 한번 해체해보십시오. 무수한 세포들의 동시공간적 조합물이 바로 우리의 몸이며 그 하나하나의 세포들은 태양계와 지구와 달이 빚어놓은 생명의 바다에서 그 오랜 시간을 거쳐 온, 관계의 끈으로 이어진 결과물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지녀온 진화의 결과물이며 동시에 인류 전체가 참여해온 의식의 바다 속에서 형성되어온 학습의 결과물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몸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몸은 세계와 연결되어있고 그 세계는 태양계, 우리 은하, 그리고 그 은하들이 연계된 그 전체의 우주와 필연적인 끈으로 묶여있습니다.
따라서 만법은 필시 하나입니다!
우주라는 하나의 몸체 속에 존재하는 각기 각각의 개별자들인 것이지요. <만법귀일(萬法歸一)>은 그를 몸으로 마음으로 깨닫는 이에게만 그 언어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그것은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심상의 교류, 즉 이미지로 포장된 이해의 차원을 넘어 존재의 차원으로 도약할 때만이 내게 살아있습니다. 그 때라야 <일귀하처(一歸何處)>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는 것과 그를 깨닫고 그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입니다. 앎은 그 언어의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단지 길을 찾아낸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 앎을 통해 그 길을 걷지 않는다면 그의 앎은 온전한 앎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일귀하처(一歸何處)!
이미 분리된 심상을 넘어 하나(一心)이거늘 어디로 돌아가고 말 것이 있단 말인가?
우주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데, 관계의 실상을 꿰뚫고 있으면서 존재 그 자체로 서있는데 지금 이 순간 여기 말고 달리 또 돌아갈 것이 어디 있을까?
엄마와 아이는 하나의 몸체에서 분리된 서로 다른 하나입니다. 그리고 분리된 서로 다른 그 둘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서로서로 교감하기 때문입니다. 교감하고 공유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는 그 아픔을 함께 느끼며 아이가 웃으면 엄마는 함께 웃습니다. 둘이 서로 깊이 교감하기 때문이지요. 그를 통해 그 서로 다른 몸체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있음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개별화된 내 몸 그리고 내 마음을 언제나 나라고 인지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각자는 얼굴도 다르고 피부도 다르고 삶의 양식도 다르고 그래서 내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 세계는 무수한 각자의 특성을 지닌 개별자들의 경연장입니다. 그리고 그 나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진화과정 속에 더불어 존재하고 있습니다. 먹고 먹히는 생명의 순환 원리에 따라서 언제나 나는 그에 대한 상대적인 타자로서 존재합니다. 그와 특성이 전혀 다른, 그래서 그와 분리된 존재로서 서있기에 함께 더불어 살아가지만 세계는 언제나 나에게 타자인 것이지요. 그러니 세계는 생존의 바다에서 경쟁자로서 서로 나뉘고 분리된 세계일 뿐 하나의 세계는 아닌 것이지요. 세계와 분리된 타자로서 존재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한 존재입니다. 한 분리된 존재로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생존환경이기에, 동시에 나는 그 생존환경에 맞선 불안하고 두려운 존재이기에 누군가와의 연대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함께 더불어 집단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누군가에게, 그 무엇인가 강력한 힘에 의지하고 의존하며 군집생활을 이어가는 것이지요. 혈연, 학연, 지연, 종교, 단체, 국가 등등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늘 기댈 수 있는 어떤 힘을 갈구하고 그에 의지하거나 의존하면서 주어진 시간을 그에 투자합니다. 권력, 부, 명예, 권위, 행위, 약물, 기타 등등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소식을 깨닫게 되면 나는 비로소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존재로서의 삶은 깨어있고 열려있는 마음을 통해 세계와 교감하는 과정입니다. 교감을 통해 일치, 즉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때 마음에는 사랑과 자비, 연민, 존중, 배려와 같은 이타적이며 포월적인 에너지가 흘러넘칩니다. 늘 감사의 마음으로 내면은 충만합니다. 나와 너, 나와 세계, 나와 우주는 하나의 몸체이자 둘 아닌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장벽이 무너진 가슴에서는 늘 타인과 교감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향상되면서 따사로운 마음이 활짝 꽃이 핍니다. 이것이 바로 일귀하처(一歸何處)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소유는 불안하고 두려운 개별적 존재가 그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나란 존재를 스스로 타자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소유를 통해 자기란 존재감을 인지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더 높고 더 많고 더 확장된 양적인 팽창을 기준으로 포만감을 느낍니다. 그 과정에서 지배와 억압과 불평등 그리고 폭력은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존재로서의 동질감, 즉 교감을 함께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소식을 아는 이는 늘 일귀하처(一歸何處)의 세계로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일귀하처는 앎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감, 공감, 공유, 공존의 세계를 이루어낼 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이 다른 것처럼 <일귀하처>는 지금 이 순간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이와 내가 마주하는 확장된 세계 속에서 함께 느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웃으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일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그 사랑과 자비의 마음은 더 확장된 형태로 흘러갈 것입니다.
<만법귀일>의 소식을 아는 것은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세계의 중심은 바로 나며 그 내가 세계와 교감하고 교류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 세계와 분리된 나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교감과 공감을 통해 일치된 나로 살아갈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전자는 늘 고해(苦海)의 바다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며 후자는 늘 충만함과 자유로움과 따듯함과 열린 마음으로 세계와 교감하고 공존할 것입니다.
언어의 지배력과 구속을 벗어나 존재의 실상에서 함께 교감하고 공감하며 공유하고 공존해나감으로서 삶에서 느끼는 기쁨과 풍요로움, 그리고 그를 통해 드러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항상 나와 우리 곁에서 활짝 꽃피어날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공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6년 5월 20일 오전 08:33 (0) | 2016.05.20 |
---|---|
불국사 (0) | 2016.05.19 |
2016년 5월 18일 오전 11:18 (0) | 2016.05.18 |
2016년 5월 18일 오전 11:15 (0) | 2016.05.18 |
2016년 5월 18일 오전 07:55 (0) | 2016.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