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자와의 만남
이명학 괴산귀농지원센터장
2010. 07. 06
귀농한지는 12년되었습니다. 그때 이 자리에 앉아서 3개월간 강의를 들었습니다. 서울귀농학교가 53기째되어가는데, 제가 7기입니다. 저는 이런자리에 오면은 옛날생각이 자주 납니다. 12년간의 기록과 이야기들을 2시간내에 풀어내기가 힘든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떤게 도움이 될지 어떻게 하면 용기를 가질지 생각을 하면서 2시간동안 제가 경험했던 것들을 간추려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98년도에 귀농학교를 수료를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샐러리맨이었습니다. 탱크나 미사일 같은 유럽쪽이나 러시아쪽을 성능분석과 가격비교를 하고 구매분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귀농을 생각한 것은 30살때였는데, 34살에 결정을 해서 내려왔습니다. 정말 지금이면 귀농이라는 말이 흔하지만 그 당시에는 상당히 낯설었습니다. 30살정도에 직장을 다니다가 집사람에게 농촌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바로 한마디가 당신이나 내려가고 돈이나 보내달라면서 난 안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왜 직장생활에 적응을 못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어느땐가 귀농학교라는 쪽지를 보면서 귀농학교로 나오고 나니까, 집사람이 특이하게 왜 농촌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이해를 못하겠다면서 부적응자나 조금 이상한 사람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런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학교에 75명정도 나왔어요. 그때 생각한 것이 나만 특별해서 환자라서 그런게 아니고 이 도시라는 구조나 문화가 사람을 굉장히 힘들게 하는 구나를 느끼고 차츰차츰 생각지도 않은 것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귀농학교를 다니면서, 제가 지금 귀농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면, 어느 도시에 살았다면 그냥 살다가 아까운 공동묘지에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지금도 새로운 인생을 사는것에 대해서 뜻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볼때는 여러분들이 100만명중에 한명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이 자리에 우연찮게 온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긍심을 높혀도 됩니다.
제일 먼저 말씀을 드릴것이 사람들이 도대체 너는 왜 농촌에 내려왔나, 이렇게 자꾸 물어봅니다. 그 당시에 두가지 이유 때문에 내려왔습니다.
첫 번째는 내 마음대로 살아보자. 이게 무슨말인가 하면 퇴근을 해서 집으로 오는데, 갈매기를 봤습니다. 저 새를 보면서 저 새보다도 내가 못하구나, 저 새는 날개가 있어서 어디에나 다 가는데, 정작 사람만큼은 가고 싶은 곳도 못가는구나,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 중에서, 남들 학교갈 때 학교갔고, 결혼할 때 결혼하고, 가장으로서 직장생활하면서 그런 생활을 해온 거에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나 스스로 결정해서 했던 것들이 있느냐 생각해봤는데, 한번도 없었어요. 그냥 우리 부모님이 바라는 나, 직장에서 바라는 나였지 일가친척들이 바라는 나, 다 그런것들이었어요. 나 스스로 우러 나와서 하고 싶은 일 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가고 싶은 대로 살아가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소비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계속 혼자 벌지 않으면 불안하게 만드는 이 사회구조가 싫었습니다. 심지어 아이와 상점같은 곳에 가보면 사달라고 하는 주변환경이나 그런 여건들이 사람을 만들게 되는 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두가지 생각들로 귀농학교를 다니면서 결정하게 되었는데, 제일 힘들었던 것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빨리 농촌으로 가야겠다고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퇴근할때마다 집사람에게 설득을 했습니다.
집사람은 농촌을 함부로 보면 안된다고, 난 안갈거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또 시도를 하고 그랬습니다. 굉장히 힘들었어요. 어느날 갑자기 출근을 하는데, 집사람이 생각을 했나봐요, 사람이 죽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 못들어주겠냐고, 그렇게 하라고 했었습니다. 그날 바로 그만두었습니다. 현관문을 바로 열고, 집사람이 다리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았습니다. 바로 그만두면 어떡하냐고 말하더라구요.
직장을 그만두고 3개월부터 어떤게 복잡해지기 시작했어요. 농촌은 싸이클이 적어도 6개월 내지는 1년단위입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고, 그리고 농촌을 가야되는데 가고싶은 곳은 많은데 갈 곳은 없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준비하시는 분들은 이 느낌을 아실 거에요. 그래서 귀농이라 하는 것은 한다리 걸치고 다른 다리 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을 완전히 닫아야 합니다. 저런식으로 귀농하는 것은 끝까지 가는걸 못 봤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인천쪽에 있을 일이 많았는데, 인천쪽에 귀농학교를 열어볼려고 집사람한테 이야기를 해서 열었습니다. 37명을 모집해서 혼자 공구,기계 다 구입하고 1기를 마치고 2기를 진행하고 농촌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저기 강원도 홍천쪽에 집을 얻어놓았습니다. 지금도 고향으로 내려가는 분들을 말리고 싶습니다. 이사가기 정확히 딱 1주일전에, 집을 얻었는데, 갑자기 이유도 없이 1주일전에 집이 안된다고 합니다. 집은 내놓아서 나갔는데, 그 날밤에 전화가 온거에요 안된다고. 두가지 경우밖에 없죠. 이때 굉장히 괴로웠던것이 일주일도 아니고 5일전에 이런일이 생겨버리니까, 다 짐보따리 싸놓고, 갈때는 없고 하니까, 아버님한테 연락을 했습니다.
없는 살림에 있는돈 없는돈 다 짜내서 공부시킬려고 고생을 많이 했었습니다. 고향으로 갈 생각은 없지만 정황은 말씀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생에 그렇게 차갑게 대한적은 한번밖에 없어요. 문을 쾅 닫고 나가시더라구요. 그때 저는 정말 서운했어요. 한편으로 아버님을 생각해보면 정말 힘든 집안살림에 교육시켜놓았는데 농촌에 온다니까 화나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산꼭대기 중턱에 집이 있는데, 잡초가 우거져서 잡초를 제거 하고 보니까, 저정도면 비는 안샐것 같은 정도였고 그리고 이사를 했어요. 12월 17일날 이사짐을 다 가져다 놓고, 애들이 큰애가 6살 적은애가 4살이었습니다. 애들은 집사람은 마당에 있는 감나무잡고 울더라구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마당에 모든 짐이 다 있는데, 이게 도시의 짐이 농촌에 안 맞습니다. 일단 11월달에 왔으니까 나무도 없고, 짐은 안들어가고 어떡합니까. 그래서 하여튼 나무로 된것은 다 때고 나니까 정리가 다 되었습니다.
이사가기 전날 달빛이 싱글하게 비추고 있는 걸 보면서 농촌에 가서 살아야 하나, 너무한거 아닌가, 그리고 가족들이 자는 모습을 보면서 꼭 이렇게 해야하나.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무엇을 먹고 살아야 될지.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여기와서 살아오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는 그렇게 걱정이 되고 오만가지 걱정하고 어떻게 살까, 이런 생각만 들었지 의심만 계속들었는데 막상 와보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했다시피 고향으로 내려가지 마십시오. 단, 고향에서 3년이나 4년정도 사시면 굉장히 좋은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이 힘들어요.
어떤 부분이냐하면 제가 클때 다 보는 사람들이니까 사람으로 인정을 안합니다. 고향으로 가면 그 만큼 한계가 있습니다. 고향으로 가는게 문제가 뭐가 있냐면, 아버님 친구분의 논인데, 물을 위에 논부터 채우고 앞에 논부터 채우는데, 아버님친구분이 자네 아버지하고 나하고 친구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면서 양보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그 다음에는 제가 고향으로 내려가서 2년간 모친이 저희집에 한번도 안 오셨습니다. 면소재지에서 나름대로 잘 나간다는 아들이 왜 내려왔냐고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2년지나니까 오시기 시작하더라구요. 얼마나 속이 상한지. 이게 그 당시만해도 농촌에 대한 정서였어요.
오죽하면요, 할아버지한테 여쭤봅니다. 할아버지, 동네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왔으면 좋겠습니까 물어보면 당연히 농촌에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자기 아들이 들어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은 필요한데 자기 아들은 안 원하는 겁니다. 힘드니까 그렇겠죠. 그래서 여기에 귀농이라는 것들이 다 담겨있습니다. 논 800평을 짓는데, 제가 어느정도 열심히 했느냐면, 한 200평은 밭을 짓고, 600평은 논을 지었습니다. 어느정도로했냐면 밥먹고 나갑니다. 그때 풀이나있으면 새벽 2시까지 뽑아요. 그런데 저는 농사를 안 지어봤기 때문에, 농사라는 것이 이정도로 힘들어야 되는게 아닌가 하면서 그때는 미련하게 했어요. 근데 그게 힘들지 않았어요. 잘 모른다는게 굉장히 이렇게 좋은 점도 많이 있습니다. 하여튼 그게 아주 조금만 도와주고 방법을 열어주면 편한데, 아무것도 모르면 막막합니다. 그리고 집이라든가 살 터전을 구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한 5급공무원을 그만둔 사람이 농사를 짓겠다고, 제일 처음에 간 곳이 보은의 어떤 집을 봐놓았는데, 다른것은 다 좋은데 한곳이 안좋다고해서 승용차타고 3개월간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450만원 들었습니다. 근데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이 제일 처음 갔던 곳입니다. 찾아서 돌아보니까 이만한집이 없다고 하는 거에요.
이 경험이 없고, 집을 볼 수 없는 안목을 지닌 사람은 제일 나쁜거만 봅니다. 집 뒤에 산소가 없었으면, 하면서 나쁜거만 들어오는 거에요. 그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근데 어지간하면 비안새고 그러면 일단 들어가서 사는것이 좋습니다. 저도 귀농할 때 생각할 때 뒤에는 높은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르고, 옆에 집이 있고, 그 다음에 천평짜리땅이 있는 곳을 찾았어요. 하지만 이런데 없습니다.
단연코 말씀드리는데, 살만하다 괜찮다 싶으면 돈있는 사람들이 땅을 다 사놓았습니다. 조금 더 말씀드리면 이게 굉장히 문제가 큽니다. 마지막에는 어떤지역을 선택하느냐하면 나와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나중에 사람을 보고 찾는 거에요. 그렇게 됩니다. 일단은 그 지금 귀농이란 말을 퍼뜨리는 것은 96년도에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따서 귀농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붙였습니다. 2000년도 정부에서 귀촌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농사는 짓지 않지만 그냥 농촌에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지금은 귀농,귀촌이란 말을 한데 묶어서 쓰죠. 10년전과 귀농의 모습을 바라보겠습니다.
10년전에 귀농이라고 하면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서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을 귀농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나는 정년퇴직을 해서 농촌으로 살러가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그 주변에 나는 농산물을 유통하는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장유,농산물 가공식품을 소규모로 해서 생계를 이어나가겠다는 사람도 늘어나고 그리고 농촌과 관련된 기획을 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잘 기획하는 사람들이 귀농인들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도시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도시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압니다. 그 다음에, 치유를 목적으로 해서 농촌으로 내려오거나 애들 교육 때문에, 교육문제 때문에 넉넉하게 시골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고령자를 대상으로 하는 봉사를 하면서 살아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으로 농촌이 복지와 관련된 부분들에 대해서 수요가 폭발할 겁니다. 이것은 미리 준비하셔야 합니다. 복지와 관련된 일을 무엇을 할 것인지, 단순하게 공부만 하는것이 아니라 실제로 할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요즘 천연염색이 뜨고 있으니까, 천연염색을 배우겠다는 것과 천연염색만 하는게 아니라 바느질을 배우고 재봉을 배워서 옷과 관련된 일을 해보겠다는 것도 좋습니다. 이런 일들 중에 하나가 단순히 농사를 짓고 살겠다고 합니다. 이런것들은 모두 다 필요합니다. 나는 도시에서 회계사를 하고 있는데 농촌에가서 뭘 할 수 있냐고 하는데, 지금 농촌에 가보면 영농조합 법인회계하시는 분들이 없어서 모두 외부에서 의탁을 하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회계하시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벽돌만 쌓는 막일도 밖에서 다 외부에서 사서 합니다. 그러니까 농촌에 일손이 많이 모자라는 거지요. 안될게 뭐가 있습니까. 그게 10년전과 달라진 귀농의 패턴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야합니다. 물론 농사를 지으면서 지내는 것도 좋습니다. 현실적으로 농촌의 모습을 생각해볼때, 할아버지,할머니들 무릎 안아픈 사람이 없습니다. 밤에 끙끙앓다가 아침 4시에 첫차를 기다려서 1시간 30분정도 시내까지 나와서 한의원까지 걸어갑니다. 한의원가서 침맞고 버스다시 기다려서 타고 집까지 걸어오면, 그날 침맞으러 안간것 보다 더 아파요. 그러면 이 침 맞은 사람은 돌보는 사람은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각 나이에, 각 여건에 맞는 것을 찾아서 하셔야합니다. 연령대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상담하러 와서 한 사람이 왔는데, 퇴직금 3억가지고 여러가지할 계획이랍니다. 그래서 달달이 2백에서 4백정도 수입이 올라올거라고 애초부터 계획을 했답니다.
제가 볼때는 농촌에 딱 들어오자마자 뭐가 보인다는 사람은 딱 두종류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돈이 많거나, 두 번째 사람은 정보를 잘못 알았거나 그렇습니다. 답답합니다. 요즘에는 블루베리 바람불고 그러는데, 블루베리만 올인하면 부자가 되는줄 압니다. 가시오가피를 어떻게 만드는줄 아세요. 다섯농가를 섭외를 합니다. 제주도,충청도,전라도,강원도 한명씩에다가 무료로 천평씩 나누어주고 심어라고 하고 가을에 전량을 수거하고 3천만원줍니다. 그리고 전량폐기 합니다. 3천만원 들어오는 거 보고 나서 한농가가 백농가를 끌어옵니다. 그런채로 딱 2년을 합니다. 첫 번째는 다섯농가하고 두 번째는 열농가를 합니다. 6천만원씩 주고 폐기시킵니다. 그리고 수천농가가 됩니다. 이 전에 묘목을 준비해놓았습니다. 다섯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겁니다. 가시오가피,흑깨나무,오미자 다 이런식으로 나가는 겁니다. 돈이 모인다고 싶으면 돈이 한쪽으로만 모이게 되는 겁니다. 그 중에는 이런 방법으로 성공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하면 제일 먼저 농촌에 들어와서 막막하다 깜깜하다는 사람들이 정상이에요. 왜 그런가하면 지금 귀농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게 3년만 지내보면 자동으로 알게되요, 그리고 이때 농사일을 도모를 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있을때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하셔야 합니다. 3년동안에 지역에 들어서 살다보면 웬만하면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를 지금부터라도 꼼꼼히 준비하고 배우십시오.
이 이야기에 덧붙여서 상주,경주,강진,진해 같은 지자체에서 귀농을 유치할려고 난리들인데, 문제입니다. 왜 귀농을 유치할려고 각 지역에서 노력하는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다른 시는 비교를 못하겠습니다만 상주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상주시 전체가 일년에 3천명씩 줄어들었어요. 그리고 상주시 2006년도에 인구전체 인구의 천4백명이 사망을 했는데 출생을 450명을 했고, 2007년도에는 천6백명이 사망을 했고 출생을 300명을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말인지 모를 수도 있어서, 면으로 들어가면 제가 있는 면의 인구가 1786명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매년 70명이 사망을 합니다. 2명이 출생을 해요. 인구 1786명중에서 여자는 800명이고 그 중에 폐경이 이전의 여성은 230명이에요. 그리고 가임여성을 조사해보면 50명이에요. 50명중에서 당장 애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을 조사해보면 2명이에요. 년안에 애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이 두명인데, 저까지 포함해서 이 세명이 매년 10년동안 1명씩 낳는다고 생각해보면 30명이죠. 그러면 1년에 사망하는 사람이 70명인데 10년이면 700명이 돌아가시죠.
인구는 2분의 1이 없어지는데, 3명이 10년간 30명을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정부가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적당한 인구가 있어야겠구나 생각을 합니다. 상주시 지자체의 재정자립도는 20%정도이고 나머지 80%는 중앙정부에서 예산을 가져오는데, 예산의 기준이 인구수입니다. 만약에 도시사람들이 농촌으로 오면 현찰이 들어오는 거에요. 여러분을 돈으로 보고 귀농을 권하는 겁니다. 경상북도에서 작년에 2천만원에서 3억까지 융자를 지원해준다고 했습니다. 진실을 보면요 모두다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데에 너무 신경쓰지마세요. 귀
농정책중에서 필요한 것도 있습니다. 빈집수리비인데, 지자체에서 약 5백만원정도 책정되어있습니다. 각 시단위에 50명정도에서 80명정도 수혜혜택을 볼 수 있고, 귀농정착금이라고 하는 것을 주는데 적게는 5백만원에서 2천만원까지 줍니다. 그럼 농촌에 오는 사람을 다 주는게 아니라 나이가 적을 수록, 가족 수가 많고, 귀농교육을 이수를 했는가에 따라서 정착금을 줍니다. 농사규모가 적을 때 만점을 줍니다. 사실은 나이드신 분들이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책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공무원,정부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것을 보면 속이 보인다는 겁니다. 지역에 소중한 사람이 들어오는 구나, 하면서 그런 마인드로 상담을 해야하는데, 아직 귀농상담교육에 대한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귀농정책만 나오니까 안 좋은 겁니다. 대부분 돈이 있는 사람들은 실패할 확률이 많습니다. 내통장에 있는 돈만 믿고 농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소규모로 하시는 분들은 살기위해서 농촌에 정착하니까 좀 더 확률이 높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귀농자들 중에서 네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도사과인 사람은 생활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머리묶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선생과입니다. 이 선생과는 귀농을 해서도 남을 항상 가르치려고 합니다. 마을끼리 농사를 짓는거보면 농토를 어떻게 해야한다고 자기 주장을 합니다.
세 번째는 탄광과입니다. 옷을 다입고 해만뜨면 밖에서 일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굉장히 성실합니다. 동네사람들을 만나서도 콩 모종을 어떻게 내나하는 고민을 벌써부터 하게됩니다.
네 번째는 남들은 일할 때 혼자 책읽는 베짱이과입니다. 전원생활을 즐기는 예술가 스타일이 많습니다.
농촌에 가서 가장 적응하는 법을 알려드리자면, 도사과에서도 두가지 유형이 있는데, 한가지는 생활한복에다가 머리를 기르는 외향적으로 금방표시나는 유형이고 두 번째는 옷이 일년에 두 벌밖에 없는 외향적인 것에 전혀 신경 안쓰는 과에요. 이 도사과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을 카리스마로 압도시키는데, 두 번째는 마을회관에 들어가자마자 인사를 하고, 중간회의때 아무말도 안하고 집에 갈 때 안녕히계세요,하고 나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많이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저사람이 무슨생각을 하는지 사람들이 알지를 못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농촌에서는 백날 밖에서 공무원이다 뭐했다 그런거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도 굉장히 유능하고 능숙한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거 다 필요없다는 겁니다. 도시에서 사람이 들어왔을때,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것은 우리와 같은 종자인가, 일손이 힘들때 도와주느냐 그런 것들을 판단합니다.
[새노래] 이 노래를 학교근처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과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좀 다릅니다.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새를 쫓는 노래라고 한다면 새는 축출의 대상이고 제거의 대상이며 죽어야 하는 대상으로 적대적인 의미를 띄고 있는 겁니다. 새를 본다고 하는 부분들은 상생의 의미로 보는 겁니다. 적어도 귀농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앞으로 머릿속에 상대방을 경쟁과 축출의 대상으로 보는 걸 지워야 합니다.
[일노래] 벼농사를 지을때 벼 모종을 척박한 곳에 잘 심을때, 모심을때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람들이 줄을 맞추어서 모를 심었다고 해요. 논 천평에 보통 여섯사람 내지 일곱사람이 모를 심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이런 노래들을 하면서 농사를 지었어요. 지금 우리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일과 노래는 분리 되어있어요. 농촌의 생활은 이런 것들이 한 공간안에서 어울러 집니다. 일하면서 노래하고 노래하면서 일을 했어요. 삶터와 일터가 분리되는 삶이 도시의 삶이라면 집속에 마을속에 한 공간안에 이런것들을 묶어두자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농촌에 가서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은 경제의 문제와 교육의 문제가 가장 큽니다. 따져봅시다. 농촌에 내려가면 얼만큼 여유자금을 가지고 있어야 되느냐고 하는데, 내가 한달에 300만원이나 400만원이나 되면 그냥 농촌에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냥 도시에 있는게 낫습니다. 삶의 형태와 규모를 줄이지 않는 상태와 얼만큼 압축적으로 살아갈지 나와야 농촌에서 살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답이 없습니다. 연봉 5천만원받는 사람은 그 만큼 무게가 있고 연봉 3천만원받는 사람들은 또 그만큼 무게가 있지만 돈이 올라가면 행복이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삶의 형태와 규모를 행복할 만큼만 유지하면 좋습니다. 그래야 답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거죠, 세탁할 때 손빨래를 해서 2시간동안 빨아서 널어요, 세탁기를 사면 그 시간에 굉장히 할 일이 많겠다하지만 더 바쁩니다. 다른 할 일들도 많기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계속 바쁘기만 하는 도시 삶이었다면 농촌에 살면 좀 여유있게 속도를 줄이고 규모를 줄이면서 내적인 것을 더 충만하게끔 설계를 할 수 있습니다. 또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부분 농촌에 내려오실 때 이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우리 집사람이 동의를 안하니까 나 먼저 내려가서 터전을 잡은 다음에 가족을 데려와야겠다 이런 생각을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보는데, 그게 굉장히 잘못됐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혼자 내려온다는게 정말 힘듭니다. 사람하고 같이 어울리기가 힘듭니다.
귀농자들이 논의를 했습니다. 결혼한 솔로는 안된다, 했어요. 왜냐하면 같이 품앗이를 해야 하잖아요. 한 사람은 아내가 농촌에 안내려오고 혼자 살아요. 그 사람은 우리집에 와서 밥을 다 먹고 가요, 우리가 그 집에 가면 반찬하고 다해주고 설거지까지 다 해주고 와야된다는 거에요. 1년이 지나고 2년이지나면 부담스러워요. 농촌에서 살다보면 어두울때 빌리러 가야되고 가보기도 하고 할 수도 있는데, 여자나 남자 혼자 있으면 잘 안가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도 소외가 되고, 내가 먼저 내려가서 준비하겠다고 하는거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희생을 하겠다는 이야기인데, 만약 내가 다 해놓고 집사람이 그냥 와봐요, 내가 그 동안에 혼자서 농촌에서 마을사람들하고 융화되었는데, 집사람이 갑자기 오면 내가 농촌에서 그 동안 지내오면서 자라온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힘들어도 어렵고 가난하고 그래도 같이 과정을 겪고 나가야됩니다. 결국은 당신은 동의안하니까 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하면 행복하자고 하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희생을 하고 행복하는 일은 없습니다. 일년이 됐든, 이년이 됐든 기다리고 설득을 해서 아내와 남편과 손잡고 함께 내려오는 게 낫습니다. 안되면 계속 마을 사람들하고 의견도 안맞고 그렇습니다. 뭐하러 농촌에 내려옵니까. 농촌의 행복을 계획하기 위해서 귀농하는 것이 잖아요. 기간이 좀 걸리더라도 집사람한테 여행삼아 농촌에도 가보자고 하면서 설득을 해보세요. 자기 피부로 정겨움같은 것들을 느껴봐야 합니다. 생명을 다루어보는 느낌을 아내나 남편한테 한번 주세요. 땅에 배추나 이런것들을 키워보시면 그 느낌을 알 수 있다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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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말씀드린 것 중에서 농촌에 정착하려는데 고려할 때, 자연환경보다는 사람을 고려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힘들게 농사를 지었습니다. 2년째에 고추모종을 팔천포기에 천평되는 농사를 했습니다. 씨를 뿌려서 조금 컸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하우스 문을 열어보니까 팔천포기 중에서 두포기 남은거 빼고는 다 가늘어졌습니다. 그래서 잘록병이라고 하는게 생겼습니다. 팔천포기가 두포기만 남고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동네사람들이 젊은사람이 왔으니까 관심을 가지면서, 막 하우스를 열어보다가 농사도 모르는 젊은 사람이 와서 농사를 망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친구들을 데려와서 왜 농촌에 들어와서 뭐 먹고 살건지하면서 이러고 불안한 시기에 아침마다 그렇게 성화를 하니까 힘들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다 치우고 다시 하라고 하면서 말해주십니다. 맞는 말씀인데, 저한테는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한 30분떨어진 문경이라는 곳이 있어요. 문경에 먼저 귀농한 선배가 있어요. 그래서 이 선배한테 전화를 했는데, 그 때 내 심정을 이 선배가 전화한마디로 이해해주는 그 순간에 눈물이 얼마나 났는지 몰라요. 괜찮다고 다 안죽는다는, 그 말 한마디요. 그때 현미식초같은 거 뿌려주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뿌려줬어요. 한달동안을 그것만 줬어요. 한달째부터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고 고추가 열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하우스 문 닫고 살았어요. 그런데 약한 부분이 한달동안 단단하게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후로 농사를 7년동안했는데요, 이때만큼 많이한적은 없습니다. 30년,40년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병이 온다그러면 어느시기에 농사를 어떤농약을 쳐야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작물의 생리를 믿어주고 지켜봐주고 관리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농사를 많이 해왔던 사람들은 다 털어버리고 바로 죽여버립니다. 이런거 지켜볼 여유가 없는 거죠.
농사를 오래지은 사람들 일수록 친환경이라는 걸 생각안하고 이해안하려고 하고 농약 안치면 안된다고 합니다. 이런 병이 왔을때 무슨 농약을 쳐야한다는 걸 알지만 그저 놔두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이런것은 모릅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왜 중요하는 것을 알겠죠. 어려울때 무슨 믿어주고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산이 좋고 물이 좋은 것보다 마음이 행복하고 온유한 상태로 유지가 되어야지 거기서 재밌게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좋은산 높은산 좋은계곡 좋은 환경 이런거 신경쓰지 마세요. 귀농하겠다고 상담을 하신 분들중에서 화려한 추상화를 그리는 사람일수록 도시에서 억압되어있고, 돈에 억압되어있고, 직장상사한테 억압되어있고, 관념에 억압되어있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사람일수록 아주 섬세하고 세밀한 추상화를 그려요. 반면에 대충 농촌으로 내려갈 생각이라는 사람하고 밤새워 이야기를 해보면 그 사람은 스트레스 받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풍요롭게 그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뭔가로부터 억압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농촌에 내려오시면 이렇게 구별됩니다. 1년차는 낭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이거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농촌을 낭만처럼 생각하냐고 하는데, 낭만을 첫해에 이사온 사람들은 느껴야 합니다. 처음에 이사와서 마당에 풀이 예쁘다고 합니다. 마을사람들은 마당에 풀 안뽑는다고 손가락질하는데, 풀도 안뽑아요. 남들은 일하는데 혼자 앉아서 막걸리 한잔하면서 지냅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농촌에 내려갑니까. 자연스러움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3년차를 뭐라고 하느냐면 절망이라고 하고 4년차를 포기라고하고 5년차를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9년전에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다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귀농자들이 딱 맞다고 생각해요.
도시에서 자기가 있는거 없는거 다 버리고 내려갔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버릴 것 많습니다. 쓸데없는 고집이나 쓸데없는 물욕 같은것들 해서 3년차되도 힘듭니다. 여기 계신분들 산속에 초막을 짓고 혼자 들어가서 살면 재밌을것 같죠? 도시에서 생각 꾸러미같은거 주렁주렁 달고 가지고 산에서 혼자 살아보십시오. 힘들고 불편하고 괴롭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정리해야하는 거죠. 나무도 캐다가 다시 옮기면 뿌리가 자리잡는데 3년정도 된다고 합니다. 사람도 똑같은 겁니다. 그러다가 5년차부터 본격적으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일 힘든시기가 언제냐고 물어보면 3년이라고 말합니다. 도시인이 농촌에 내려와서 특별한 사람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어요. 직장에서 돈벌어서 돈을 바꾸는 사람밖에 안되는 정말 쓸모없는 사람들이 도시인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젊으면 귀농하기가 쉽고, 나이가 많이 들면 어렵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귀농은 단연코 말씀드리자면 나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러는지 아세요? 젊은 사람들은 쉽다고 생각하죠? 나이 30.40에 대리나 차장급으로 다 올라갑니다. 적어도 과장급이 됩니다. 앞으로의 전개되는 상황을 포기하고 젊은시기에 농촌으로 내려가는 거는요, 직장생활을 해보신분들에게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정도 나이드신 분은 직장에서 연봉도 받고 정년퇴직도 하고 벌어놓은 거 있으니까 그러면 쉽겠다, 하는데 자식들 대학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내려가야지하다가 못내려갑니다. 그리고 60대 그 나이대가 되면 인맥도 다 연결되어있고 부동산있고 친인척들 다 있습니다. 세심하고 그 동안 생각들이 많이 있어서 결정을 하는데 2년이 걸린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어떤 인생의 깊이가 있기 때문에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이 훨씬더 귀농을 잘하고 귀농하는데, 효과적이다고 하는데, 이런 통계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저희 귀농마을에 제일 나이드신 69세인 분이 있는데, 10년전에 같이 고추를 수확하는데 땀을 얼마나 흘리셨어요, 그래서 제가 감나무 밑에 좀 쉬시는게 좋을 것같다고 했어요. 지금까지도 나이먹었다고 감나무가서 쉬라고 했다고 서운해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이 하면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나이가 한 두 살 어린것도 아닌데, 그 분이 훨씬 더 잘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저같은 사람들도 하니까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농촌에 갈 때 달달이 들어올 돈들 이런거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금의 도시에서 정도의 삶의 질과 할 것 다하면서 지금의 살아왔던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살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나는 정말 내려가기 힘들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귀농학교 수료하고 귀농하려고 하는데, 도시 자본주의 톱니바퀴에 한번 물려가게 되면 빠져나오기가 힘듭니다. 이게 한번 돌죠. 여기 한번 직장생활하면서 달달이 월급 받아보면은 여기 톱니바퀴에 말려들어가기때문에 자기가 힘이 없고 용기가 없어서 농촌에 귀농을 못하는게 아니라 이런 톱니바퀴를 빠져나올 수 있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농학교가 가치가 있습니다.
자기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변에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게 뭔지 교육받는 시간에 한번 생각해보세요. 음식쓰레기같은 게 흘려지고 처리되는지 또, 도시에 생각해보면 건강,의식구조,삶의 패턴같은 것 같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것 같은 것들을 한번 살펴보셔야합니다. 그래서 자기 주변에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해보셔야지 농촌에 내려갈 수 있습니다.
농촌에 가서 좋은 공기와 맑은 정신, 가족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꼭 얼마를 벌어야 행복합니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들은 돈으로 계산을 안하는 거에요. 무형적인 가치를 돈으로 얼마인지 따져보십시오. 이런것을 따져봐야하는 거죠.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정확한 계산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농촌에는 노총각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베트남이나 필리핀에서 오지 않습니까. 우리 마을에도 이장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자기가 벌어놓은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한다고 생각을 해서 10년전부터 마을 지도자도 하고, 농토도 사고 이것저것 사면서 농사지으면서 그랬어요. 연수입이 6천만원이고 이런데, 돈이 준비되어서 여자가 있을것 같은데, 없습니다. 이렇게 있다고 해서 여자가 올것 같습니까. 지금도 총각이에요. 농촌을 돈으로 해결하기 시작하면 이 사람이 부러울게 뭐 있어요. 그렇지만 이 사람은 죽기살기로 일을하면서 밤 12시에 자고 새벽4시에 일어나고 그래요. 그렇게 살고 싶습니까.
이제 농촌이 사람이 줄어든다고 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2년동안 귀농정책을 어떻게 하면 정부에게 대안을 제시를 할까. 어떻게 하면 상담을 하고 귀농자들을 잘 정착하게 할까, 심리적인 상담은 어떻게할까, 이런생각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제가 생각하기에는 5년이내에 굉장히 힘들어질 거에요. 농촌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아주 특권자들만 내려갈 거에요. 7년전만 해도 할아버지 다 돌아가시면 그 논과 밭은 다 내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자본이 있는 사람들이 다 들어와요. 돈이 있는 사람이 땅을 다 사버려요. 내가 그걸 다 임대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이렇게 앞으로 농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지금보다 5년후에 적어도 5배,10배 힘들어질겁니다. 앞으로 이 패턴이 계속 유지가 될 거니까요. 조사를 해보면 도시사람들 70%가 나중에 늙어서 정년퇴직하면 농촌에 가서 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발적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1%로 안됩니다. 그만큼 어려운 거에요. 왜 안됩니까. 이 도시라는 자본주의 톱니바퀴에 한번 걸려있으면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이제 귀농학교를 수료하시고 귀농지를 탐방하실 때, 귀농선배를 찾을때, 방문예의를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찾아가면 일부터 하세요.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일부터 합시다 그러면 주인도 마음이 편합니다. 제가 첫해에 손님이 매년 300~400명이 왔다갔다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화를 해요. 자기가 방문을 하고 싶은데, 방문을 해도 될까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든지 미리 연락하고 오라고 했는데, 지금 집앞이라고 하니 방문시간을 보니까 새벽 2시에요. 어떡합니까. 사람을 깨워서 밥차리고, 막걸리 주고 재워서 아침에 보내고 그럽니다. 와서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목장갑이나 면티라도 주시면 토시나 가방 만들때 좋아요. 그러니까 생활에 필요한거 사가지고 과자이런거 사오지마시구요. 과자를 2년치를 다 사옵니다. 성의가 있는거만 가지고 가시면 방문예의를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