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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연구하라고선 지원은 뚝"

날마다좋은날 2009. 4. 29. 08:39

"세계적 연구하라고선 지원은 뚝"

창의사업 13번째 입학식...창의연구단의 빛과 그늘

2009년 0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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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병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지난해 대만에서 뿌듯한 경험을 했다. 대만 교수들에게 한국의 화학 연구 수준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998년 창의연구단에 선정된 윤 교수는 지난해 서울 신촌에 있는 서강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의 화학과 교수 15명과 함께 대만을 방문했다. 이들은 대만의 화학 교수 15명과 번갈아 가며 자신의 연구를 소개하고 질문과 답변을 펼치는 방식으로 ‘진검승부’를 펼치고 돌아왔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모임을 마치는 자리에서 대만 교수들이 ‘종합 점수에서 확실히 한국에 뒤진다’고 인정하더군요. 지금까지 대만은 외국 대학을 연구 모델로 삼아 발전해 왔지만 한국을 모델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면서 많이 놀랐다는 거예요.”

윤 교수는 아시아화학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출판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국 화학의 수준을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위치다.

“1990년대 말 이탈리아 화학계와 학문 교류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수준이었죠. 1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화학계가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창의사업이 국내 연구 견인차”

“피인용수치가 높은 상위 1%논문 158편 중 창의연구단이 펴낸 논문은 23편으로 무려 18%를 차지한다. 최근 10년간 국내 주요 과학기술상 수상자 중에 창의연구자가 26.6%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발표된 바 있다.”
무엇이 한국 화학의 수준을 이처럼 끌어올렸을까. 윤 교수는 13년간 지원을 받은 ‘창의적연구진흥사업’(이하 창의사업)이 한국 화학계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큰 양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매년 최대 8억, 최장 9년까지 연구비를 지급하는 창의사업은 창의력과 아이디어가 많은 과학자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1997년 정부가 세계적이고 독창적인 연구자를 만들기 위해 만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도였다.

“창의사업에 선정된 교수들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연구 성과를 내놓자 다른 교수들에게 큰 자극이 됐어요. 특정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연구를 만들려는 창의사업이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도 함께 선도하는 역할을 해 냈다고 생각합니다.”

창의사업의 성과는 수치상으로도 잘 나타난다. 2007년 국가 전체 연구개발비 31조 원 중 창의사업은 0.01%에 불과한 340억 원만을 가져갔다. 반면 그 해 국가 전체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 2만5000여 편 중 창의연구단은 2%에 달하는 512편을 발표했다. 피인용수치가 높은 상위 1%논문 158편 중 창의연구단이 펴낸 논문은 23편으로 무려 18%를 차지한다.

최근 10년간 국내 주요 과학기술상 수상자 중에 창의연구자가 26.6%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발표된 바 있다. 창의사업이 한국 과학기술 연구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창의연구단의 한 교수는 “과거보다 명성이 줄어들긴 했지만 지금도 창의연구단에 선정되면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하나의 ‘영광’으로 받아들이고 주위에서 뛰어난 연구자로 인정받는다”고 강조했다.

지방에겐 넘기 힘든 벽

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은 법일까. 창의사업은 이달 3일 11개 연구단을 새내기로 맞았다. 그러나 ‘13번째 입학식’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최근 창의사업을 신청하는 연구단의 수가 줄고 있다. 2007년 86개 연구단이 신청한 이래 지난해 69개에 이어 올해는 60개에 그쳤다. 정부가 연구비 확대에 대한 학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창의연구단의 수를 늘렸지만 신청이 줄어 자칫 경쟁력까지 위협받는 것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창의사업 신청이 줄어든 이유로는 먼저 국내 연구자에게 연구 지원의 기회가 다양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말 창의사업을 시작하던 때보다 국가 전체적으로 연구개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정부와 민간 차원의 연구지원 사업이 늘었다.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 사업과 같이 대규모 연구지원 사업까지 생기면서 과학자들에게 창의연구단의 매력이 다소 줄어든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아직도 기초과학 분야에서 창의사업이 국내 최고의 연구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다만 최근 창의연구단 현황을 보면 지방의 연구단이 부족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올해 계속 지원받는 36개 연구단 중 지방대는 5개(부산대, 인하대, 충남대, 충북대)에 불과하다. 새롭게 선정된 11개 연구단 중에서도 충북대 1곳 밖에 없다.

지방 연구단의 어려움은 선정 단계뿐 아니라 평가에서도 나타난다. 지난 달 2006년 선정된 연구단 단계 평가 결과가 나왔다. 총 10개 연구단 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연구단은 인천과 광주 지역 대학으로 나타났다.

“올해 계속 지원받는 36개 연구단 중 지방대는 5개, 신규 선정된 11개 연구단 중에서도 충북대 1곳 밖에 없다.”
이들 지방 연구단은 “우수 연구인력을 구하기 힘들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창의연구단에 선정되면 연구단장은 3년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못한다. 3년이 지나도 지방에서는 수도권으로 오지 못한다. 연구인력을 구하려 해도 지방에 있다보니 좀처럼 찾기 힘들다. 대학 내에서 학생을 모으려 해도 연구의 강도가 심하다는 소문 탓에 쉽지 않다. 혹 대학원에 입학하더라도 석사과정을 마치면 취업을 하거나 더 좋은 대학으로 유학을 선택하기 일쑤다.

외국학생이 유일한 대안이지만 아무래도 한국 학생보다는 수준이 떨어진다. 미국에 있는 주요 대학에 가지 못해 한국으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구실에 외국 학생이 많아질수록 한국학생의 지원이 줄어드는 악순환까지 발생한다. 대학 내에 외국학생의 한국 정착을 돕는 시스템이 부족해 연구실 소속의 한국 학생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연구단장은 아무리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연구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기 어렵다. 그나마 올해부터는 1단계 3년을 통과한 연구단장은 수도권으로 올 수 있게 규제를 완화했다. 2006년 선정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이효영 박사는 올해 평가를 통과하자마자 성균관대로 자리를 옮겼다. 대전 배재대의 김칠민 교수는 9년 간의 창의연구를 마치고 후속사업인 도약연구단은 서강대로 옮겨 시작했다.

이효영 박사는 “연구단이 본 궤도에 진입하기 위한 처음 3년이 가장 힘들다”며 “세계적 리더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있던 규제도 풀어 연구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협동 연구 막는 규제 풀어야

해외연구팀과 협동은 허용하지만 국내 협동 연구를 제한하는 규정도 연구단장에겐 큰 부담이다. 일부 연구단장은 “창의사업에 선정되면 주위 교수의 부러움도 받지만 시샘도 무시할 수 없다”며 “협동연구를 하기 힘들어지면서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창의연구단에는 일부 연구를 다른 교수에게 맡길 수 있는 ‘서브그룹리더’라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젊은 연구단장에겐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국내 정서상 젊은 사람의 지휘를 받으며 연구하려고 나서는 경우는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창의연구단을 ‘장의(葬儀)연구단’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바깥에선 화려해 보여도 속으로는 죽을 맛인 거죠. 9년을 마치고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렸다거나 단계 평가 자리에서 눈물을 쏟아냈다는 말이 결코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랍니다.”(A창의연구단의 단장)

연구인력은 모이지 않고 협동체제는 부족한 상황에서 연구단장 홀로 모든 연구를 이끌어 가는 연구단이 적지 않다. 2008년 선정된 충남대 김동표 교수는 “창의연구단 내의 협동 체제나 선배 연구단장과 후배 사이의 ‘멘터-멘티’ 관계를 만들어 주는 조치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9년 뒤에도 꾸준한 지원 아쉬워”

9년의 창의사업을 마친 연구단은 도약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최장 5년간 매년 최고 4억원을 지원받는 조건이다. 창의연구단의 연착륙을 돕기 위해 마련된 사업이란 뜻으로 ‘일몰(日沒) 제도’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현재 도약연구를 하고 있는 윤경병 교수는 지속적인 연구지원이 부족한 현실에 아쉬움을 내비친다.

“중국에도 창의사업과 비슷한 ‘쳉콩 프로젝트’가 있어요. 5년마다 재심사를 하지만 연구비를 줄이는 경우는 없어요.”

창의연구단장들은 창의연구단 상당수가 정부 지원으로 9년 만에 세계적인 연구단이 됐으나 그 뒤에는 지원이 절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연구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초과학을 하는 연구단이 특허 수입이나 기업의 지원을 받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점차 치열해지고 있는 국제 경쟁 관계 속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선 연구단에 대한 지원을 줄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재웅 동아사이언스 기자 ilju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