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각중독증은 악마의 저주일까?
“손과 발에 괴저를 일으켜 불구로 만드는 맥각중독증은 가난한 사람들이 값싼 호밀 빵을 먹고 생긴 식중독이었다”
수천 년 동안 북부 스페인으로부터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가축들은 피부가 붉어지고 물집이 생기거나 타는 듯한 감각을 느끼기도 하고, 아랫배의 몹시 고통스러운 통증, 근육경련, 불안, 떨림, 경련, 환각과 영구적 정신이상, 손가락과 팔다리의 괴저와 상실, 유산, 그리고 때때로 죽음까지 다양한 증상을 주기적으로 겪었다.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 만연하는 다른 병과는 달리 이 병은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심했다. 이 병의 발생정도는 해마다 달랐고 가족들에게는 같이 발생하지만 이웃으로 전염되지는 않았다. 어린이와 노약자는 이 병에 훨씬 더 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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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Saint Anthony | 초기에 나타나는 타는 듯한 감각에 시달린 사람들의 느낌에 따라 이 병은 ‘악마의 저주(devil's curse)’, ‘화염(fire)’, 또는 ‘지독한 화염(holy fire)’ 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몇 년간 이 병이 극심하게 발생해 오던 중 1903년 남부 프랑스에서는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종교적 명령이 만들어졌다. 이 명령을 후원한 성인이 Saint Anthony였기 때문에 이 병은 ‘St. Anthony의 화염(St. Anthony's fire)’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이 병을 막아달라는 염원으로 사람들은 St. Anthony가 새겨진 메달이나 옷을 입고 다녔다.
‘St. Anthony의 화염’은 오늘날에는 맥각중독증(麥角中毒症, ergotism)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맥각(麥角, ergot)을 만드는 곰팡이에 감염된 재배작물이나 야생 벼과식물로부터 나온 곡물을 먹었을 때에 생기는 식중독 증상이다.
맥각은 박차(拍車)를 뜻하는 프랑스어 ‘argot'에서 유래하며, 맥각병균인 Claviceps purpurea 가 식물의 종자 자리에 만드는 단단하고 보랏빛을 띠는 검은색의 이삭 낟알같은 균핵(菌核, sclerotia)의 일종으로서, 수확 이후에 제분을 하는 과정에서 낟알과 섞여 식품을 오염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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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건전한 보리 낟알과 섞여있는 보리의 맥각균핵 | 맥각은 또한 이 곰팡이가 호밀, 보리, 밀 등의 곡류와 벼과식물에 일으키는 병의 이름이기도 하다. 식물병으로서 맥각병은 자신이 감염한 낟알을 맥각으로 완전히 대체함으로써 곡류 산출량을 현저하게 감소시킨다. 기후와 기주 식물, 그리고 맥각을 형성하는 곰팡이의 종류에 따라 재배포장과 수확곡물에서 맥각 발생량은 달라지기도 한다. 맥각이 섞인 곡류를 사람과 동물이 먹게 되면 맥각중독증이 생기기 때문에 곡류에 남아 있는 맥각을 제거하거나 맥각이 섞인 곡류를 폐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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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호밀 맥각병 |
<그림 4> 보리 맥각병 |
<그림 5> 밀 맥각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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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맥각 알칼로이드인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의 화학구조식 | 맥각은 여러 종의 효능 있는 알칼로이드와 기타 생물활성화합물을 가지고 있어 우선적으로 뇌와 순환기계에 영향을 준다. 가장 잘 알려진 맥각 알칼로이드는 lysergic acid diethylamide로서 이것이 바로 1960년대의 히피(hippie)문화에서 환각제로 널리 사용되었던 악명 높은 LSD이다. LSD처럼 곰팡이가 생성하는 독성물질을 균독소(菌毒素, mycotoxin)라 하고 맥각중독증처럼 균독소에 의해 생기는 질병을 균독소증(菌毒素症, mycotoxicoses)이라고 한다. LSD에 의해 유발되는 균독소증의 가장 가벼운 증상이 환각증상인데 히피들은 이미 그 원리를 터득하고 LSD를 환각제로 사용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맥각병에 오염된 음식물을 먹은 사람과 동물에 발생하는 균독소증은 정맥을 수축시키고 괴저를 일으키는 맥각 알칼로이드는 사람과 동물에게 치명적 피해를 준다. 손가락과 팔다리에 괴저가 일어나서 절단을 해야 하고 심지어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맥각 알칼로이드의 성질은 출산이나 심한 사고로 발생하는 과다출혈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맥각을 갈아 상처에 붙이는 의사와 산파에 의해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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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맥각증독증에 걸린 송아지의 다리 |
< 그림 8> 맥각중독증으로 불구가 된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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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Julius Caesar |
맥각병은 고대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기원전 1100년에, Assyria에서는 기원전 600년에 묘사된 바 있으며, 유럽에서는 유목민족인 반달족(Vandals)이 동부유럽을 침입한 후에 호밀이 곡식으로 도입된 후 이 병이 널리 퍼졌다. 중세 유럽에서 이 병은 산발적으로 심하게 대발생하였는데, 추운 겨울날씨가 호밀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서늘하고 습한 봄날씨가 호밀의 개화기에 지속되는 해에 이 병은 특히 대발생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이 호밀이었고 서늘하고 습한 날씨가 이 병을 일으키는 곰팡이의 생장을 좋게 하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이 병이 특히 심하게 대발생했다. Julius Caesar가 프랑스에 출정했던 중 한 번은 그의 군대가 이 병 때문에 심하게 고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프랑스는 잘 기록된 대로 857년, 994년 1093년 등을 포함하여 ‘지독한 화염’의 대발생을 몇 번이나 겪었었으며, 994년의 경우에는 이 병으로 2만명 내지 5만명이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Salem의 Salem 마법심판은 실제로는 맥각병균에 오염된 밀가루를 소비한 데 따른 ‘지독한 화염’의 결과였을 수도 있다. 1722에는 러시아 Peter대제 군대의 병사 2만명이 심하게 감염된 밀로 만든 빵을 먹고 죽었다. ‘지독한 화염’은 심지어는 20세기 중에도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러시아에서는 1926-1927년에 1만명이 이 병의 피해를 받았으며, 1927년 영국에서는 200건 이상이 보고되었고, 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는 1951년 200명 이상이 피해를 받아 그 중 32명이 정신이상이 되었고 4명이 죽었는데, 이들 모두 맥각병균에 감염된 밀가루로 만든 빵을 먹어 맥각중독증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동물과 가난한 사람들이 자주 먹는 값싼 호밀이 맥각이 가장 자주 나타나는 기주 식물인 반면에 부자들이 선호하는 밀은 맥각이 가장 덜 나오는 기주 식물이다. 따라서 전해오는 민간요법은 환자에게 값싸고 조잡한 호밀 빵보다 값은 비싸지만 하얀 밀 빵을 먹도록 권장하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맥각중독증은 악마의 저주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맥각병에 걸린 값싼 호밀 빵을 먹고 생긴 식중독의 일종인 것이다. 가난은 예나 지금이나 천형일까? 가난하지 않았다면 맥각중독증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았을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