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삼일운동’을 하자고 조용히 외칩니다
불자삼일운동’을 하자고 조용히 외칩니다
우리가 알듯이 불교의 교의(敎義)는 자(慈) ․ 비(悲) ․ 평등(平等)이라는 세 가지 일을 근본으로 삼고, “어떤 악행도 하지 말라. 많은 선행을 하라. 자기의 마음을 정화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는 세 가지 일을 행지(行持)로 삼습니다. 그리고 성불이란 복덕과 지혜의 원만 성취입니다.
저를 포함한 대다수 불자들의 신행(信行)은 오늘날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불자들의 올바른 믿음과 실천을 위하여 다음 세 가지 운동을 시작하자고 조용히 외치면서, 이를 ‘불자삼일운동(佛子三一運動)’이라고 이름 짓고 간단히 설명합니다.
첫째, ‘일일일선(一日一善) 실천운동(實踐運動)’입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서 능력껏 날마다 작은 선행 하나라도 실천해가자는 것입니다.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은 말합니다. “인과(因果)란 무엇인가? 우리가 짓는 선악(善惡)을 인(因)이라 부르고, 그 때문에 받는 고락(苦樂)을 과(果)라 부르며, 과(果)의 근거를 이루는 것을 인(因)이라고 하고, 인(因)을 근거로 하여 생기(生起)되는 것을 과(果)라 한다. 이와 같이 근거와 생기가 서로 의존해 있는 것을 한데 묶어 인과라 하는 것이다.”
법집요송경(法集要頌經)은 말합니다. “작은 선행을 복보가 없다 하여 가벼이 알아서는 안 된다. 물방울은 아주 작지만 차츰 큰 그릇까지도 채우는 것처럼 선행도 점점 늘어 가면, 작은 것이 큰 것을 이루게 된다.”
십선업도경(十善業道經)은 말합니다. “보살은 한 가지가 있어서 온갖 악도의 괴로움을 끊게 된다. 한 가지란 무엇인가? 밤낮으로 늘 선법(善法)을 사유하고 관찰함으로써 모든 선법을 부단히 늘려 가서 불선(不善)이 조금도 섞이지 않게 함이다. 이렇게 하는 태도는 영원히 모든 악을 끊고 선법을 성취하여,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그 밖의 여러 성자를 항상 가까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선법이란, 인간과 천인과 성문의 깨달음이나 독각의 깨달음이나 부처님의 깨달음이 다 이것에 의해 이루어지는 까닭에 선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식이 말하기를, 열 가지 선행[十善業]을 정말로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초석이며, 세상이 태평하고 인간세계 정토를 건설하는 주축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일인일경(一人一經) 전공운동(專攻運動)’입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널리 배우되 특히 자기와 인연이 있는 요의경전[了義經]을 하나 선택하여 전공 수준까지 깊이 학습 연구하자는 것입니다. 경전은 부처님의 법신 사리요, 경장(經藏)에 깊이 들어가면 지혜가 바다와 같아진다 했습니다. 경전을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무지오도(無知誤導) 망자존대(妄自尊大)하기 십상입니다.
대집경(大集經)은 말합니다. “세상의 온갖 경전과 소(疏) ․ 논을 다 통달하면, 이 때문에 깨달을 때에 부처님의 지혜를 얻어 다시는 미혹하지 않게 된다. 이런 지혜를 무애지(無碍智)라고 한다.”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은 말합니다. “보살의 박학[多聞]에는 열 가지 공덕이 있다. 첫째는 번뇌의 양상을 아는 일이요, 둘째는 번뇌를 떠난 경지를 아는 일이요, 셋째는 의혹을 떠나는 일이요, 넷째는 바른 견해를 지니게 되는 일이요, 다섯째는 비도(非道)를 떠나는 일이요, 여섯째는 바른 도리에 안주하는 일이요, 일곱째는 감로의 문을 여는 일이요, 여덟째는 부처님의 본성에 접근하는 일이요, 아홉째는 온갖 중생의 광명이 되는 일이요, 열째는 악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이다. 이것이 박학에서 오는 열 가지 공덕이다.”
셋째, ‘일인일문(一人一門) 수행운동(修行運動)’입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자기 근기에 적합한 법문을 하나 선정하여 변치 말고 수행하자는 것입니다.
능엄경은 말합니다. “박학하더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무식한 것과 같으니 먹는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해도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선지식이 말했습니다. “능엄경 25원통(二十五圓通)의 보살들은 저마다 오랜 겁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장기간 닦아 익혀서 비로소 성공한 분들입니다. 경은 말합니다. ‘본원으로 돌아가면 자성에는 둘이 없지만, 방편에는 많은 법문이 있다[歸元性無二, 方便有多門].’ 스물다섯 분의 보살은 저마다 한 가지 법문만을 전일하게 닦았습니다. 그래서 ‘일문심입(一門深入)’입니다. 만약 한 보살님이 여러 법문을 수행하려 욕심 부렸더라면 아마 원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62억 줄기의 갠지스 강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 법왕자들의 명호를 받아 지님이 관세음보살 한 분의 명호를 받아 지님만 못하다고 한 것입니다. 금강경은 말합니다.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是法平等無有高下].’ 그러므로 저마다 한 가지 법문을 닦되 서로의 수행법을 비방하거나 깔보거나 뽐내거나 하는 것은 모두 옳지 않습니다. 법문이 많지만 법문마다 모두 생사를 마칠 수 있습니다. 한 법문으로 깊이 들어가려면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만약 곁으로 다른 종파에 통하고 싶다면 그 기본과 보조를 알아야 합니다. 선종 수행자는 선종법문을 기본으로 하고 나머지 종파의 교리를 보조로 삼아야 합니다. 정토종 수행자는 정토법문을 기본으로 하고 나머지 종파의 교리를 보조로 삼아야 합니다. 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불이든 진언 수지이든 참선이든 한 가지 법문을 선정하여 곧장 해나가고 영원히 물러나거나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공하지 못하면 내일도 하고, 금년에 성공하지 못하면 내년에도 하고, 금생에 성공하지 못하면 내세에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어느 선지식이 염불이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또 이틀 염불하고, 내일 어느 선지식이 참선이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또 이삼일 참선합니다. 이것도 좀 해보고 저것도 좀 해보고 죽을 때까지 그런 식입니다. 결국은 성과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 어찌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은 말합니다. “스스로 숙명(宿命)을 보니, 한량없는 겁 이래로 생사를 반복하면서 쌓인 몸의 뼈가 수미산(須彌山)을 능가하고, 그 골수가 땅을 칠한 것이 천하의 삼천세계를 두루할 수 있으며, 그 피가 흘러서 떨어진 것은 고금의 천하에 널리 내린 비보다 많으니, 다만 이 생사의 우환을 벗어나려고 한다면 밤낮으로 정진하여 무위(無爲)를 구해야 한다.”
위와 같이 저는 ‘불자삼일운동’을 시작하자고 조용히 외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