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바르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려져”
말은 약이면서 독이다. 위로는 힘이 되는 반면 비난은 칼끝과 같다. 막말과 뒷말은 귀에 거슬리고 험담과 잡담은 피곤하다. 말 한 마디 잘못해서 신세를 망치는 경우도 여럿이다. 말본새가 그 사람의 인격과 동일시되는 게 인간사이니, 입조심만 해도 중간은 가는 게 이치다. 그리하여 언어는 생각의 그릇이라지만, 그릇된 생각을 담은 언어라면 그냥 엎어버리는 게 낫다. 또한 더럽고 치졸한 말들과는 아예 말을 섞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묵언(黙言)은 가장 간단한 수행법이다. 쉽게 말해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독선을 꾸짖고 화합을 권하는 불교에선 말을 아끼는 게 미덕이다. 뒤가 구릴수록 말이 많아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고도 했다. ‘말하는 순간 틀린 말이 된다’는 뜻이다. 언어의 숙명은 분절이어서, ‘이것’을 말하는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갈라져 나오고 만다. 이것에 아무리 해박하더라도 이것 아닌 것에는 무지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모르니까 외면하고 멸시한다.
한걸음 나아가 선사들은 동념즉괴(動念卽乖)도 가르쳤다(선가귀감). ‘생각은 일어나는 순간 어그러진다’는 의미다. 마녀사냥이나 인종청소에서 보듯, ‘바름’이라는 소신은 ‘삿됨’보다 더 악랄한 삿됨으로 변질되기 일쑤다.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불립문자(不立文字)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도불가설(道不可說)이어서, 언어로 표현된 진리는 왜곡된 진리요 말뿐인 진리다. “일체의 모든 법은 오직 망념에 의해서 차별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법은 본래부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대승기신론).”
하지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이, ‘불립문자’라는 가르침도 결국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중국 선종의 6조인 혜능(慧能)은 조사선의 완성자로, 불립문자의 근간을 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조차 <육조단경>에서 문자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불립문자를 말하지만, ‘불립’이라는 두 글자도 문자”라고 전제하면서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했으면 언어도 문자이므로 언어를 아예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요컨대 사람에게 입이 있는 이상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억지로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본성에 위배되는 일인 셈이다.
이렇듯 인간은 언어를 떠날 수 없다. 아울러 혜능도 인정한 ‘불리(不離)문자’의 질곡을 외려 ‘양성화하는’ 움직임이 훗날 선가에 나타난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새로운 조류로 형성된 문자선(文字禪)이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문장으로 선(禪)의 궁극을 표현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문자선은 인쇄기술의 발달과 함께, 시문에 능한 사대부와 선사들 간의 왕성한 교류에 힘입어 흥행했다. 다만 문약(文弱)이 약점이었다. 글재주에만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선 특유의 일상성과 생명력을 잃었다는 반발을 샀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오늘날 종단의 정통수행법인 간화선이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조주종심 선사의 화두는 유명하다. 하지만 조주는 불성이 있다고도 했다. 없다면 “업식이 있어서”고 있다면 “알면서도 범한 것”이라며 사뭇 애매한 반응이다(종용록). 선승의 ‘말 바꾸기’는 ‘있다’ ‘없다’라는 분별에 얽매여 고집을 피우거나 번뇌를 자초하지 말라는 당부로 읽힌다. 혜능은 <법화경>을 3000번 읽었다고 뻐기는 법달(法達)을 다음과 같이 힐책했다.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려지는 법이다.” 누가 뭐라고 시비하든 제 갈 길을 가는 삶은 당당하고 단출하다.
[불교신문3128호/2015년8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