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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法會)의 인유(因由)

날마다좋은날 2015. 8. 14. 19:04

법회(法會)의 인유(因由)

 


강의 : 김영태(동국대 명예교수)

 

 

 

 

 

 

 

 

 

 

 

목 차

 

<blockquote>

Ⅰ. 법회(法會)의 인유(因由) -불광 연기담(緣起談)- 1. 정명(淨名)의 보살행 2. 정명(淨名)의 본원신(本願身) 일행장(日行藏)보살 Ⅱ. 중심 사상 1. 반야바라밀 사상 1) 마하반야바라밀 깨침의 선언 2) 반야바라밀 본체론(本體論) 3) 반야바라밀 공덕론(功德論) 4) 반야바라밀 구경론(究竟論) 5) 『대론(大論)』을 통한 입증(立證) 2. 무한생명 사상 1) 무량공덕 생명의 원천 2)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3) 바라밀 실상생명 Ⅲ. 행화(行化)의 실천 1. 보현행원 실천 2. 반야바라밀 대행(大行) 3. 불국정토 성취 4. 법등(法燈) 운동 전법(傳法) 실천 Ⅳ. 전통성과 창의성의 현실적 정법구현 -맺음 글- 1. 정통(正統)과 전통 및 역사성 계승 2. 무한 창의력의 발현 3.불교세계 완성을 위한 傳法의 구현 붙임말 Ⅰ. 법회(法會)의 인유(因由) -불광 연기담(緣起談)-

</blockquote>

 

 

1. 정명(淨名)의 보살행

 

 

세상의 모든 일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는 원인과 조건이 앞서 있는 법이다. 그러한 연기(緣起)의 법리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에게도 해당되는데 하물며 위대한 불사(佛事)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 세상에 출현하신 부처님1)께서도 셀 수 없는 과거세에 큰 서원을 세우시고 한량없는 수행(難行苦行)과 중생 구제의 보살행을 거듭하셨다. 중생 세간의 불사(佛事) 중에서 보살행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광덕(光德) 스님의 한 평생 보살행은 이제 불광(佛光)운동으로 결과 되어 약동하고 있다.

 


모든 불사(佛事)에는 원인〔因〕과 조건〔緣〕이 있듯이 불광의 대불사를 이룩한 주인공인 오늘의 광덕 대선사(光德 大禪師)에게도 과거 인지(因地)의 본서원력(本誓願力)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물론 모든 불보살이 다 그러하듯이 진여일심(眞如一心)의 본각불(本覺佛)을 그 본원(本願)의 고장으로 삼았겠지마는 스님이 예토(穢土)인 사바세계에 태어나서(來生하여) 교화하기 어려운 중생을 제도하고 바라밀 정토를 성취하려는 대원(大願)을 세운 출발점〔因地〕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광덕 스님의 일대불사(一大佛事)인 불광운동의 사상과 실천을 총괄적으로 조명해 보기에 앞서, 먼저 여기에서 그 큰 원력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하는 본서발상(本誓發祥)의 본적지라 할 본원신(本願身)의 내력을 경설(經說)을 통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보현행원’으로 보리(菩提) 이룰 것을 주창하시고 몸소 실천하신 금하당(金河堂) 광덕 스님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보현(普賢)보살’2)이므로 보현보살의 본원력이 바로 그의 본원처(本願處)일 것이며 아울러 그는 보현보살의 분신이며 후신(後身)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더구나 보살행의 본원처나 그 연원 및 전신(前身)이나 본원신(本願身)을 추구함에 있어서는 더더욱 부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그 근거(典據)가 밝혀져야 한다. 곧 불설 경전(佛說經典)이 일체 보살 모든 원행(願行)의 원적부(原籍簿)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경(佛經)에 의하면 보현보살은 널리 부처님의 참법을 펼치고 무량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헤아릴 수 없는 방편의 몸을 나투시는 (化現 또는 分身의) 일은 보이고 있으나3) 중생의 업신(業身)으로 다시 태어나서 스스로의 신행과 심원〔普賢行願〕을 다시금 닦는 수행자가 된다는 이야기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단지 그 행원의 실천자〔보현행자〕는 누구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현보살을 태어난 몸〔胎生身〕의 본원신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신기하게도 불경(佛經)에서 광덕 스님의 모습과 닮은 한 분의 보살상(菩薩像)을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유마힐〔毘摩羅詰·無垢稱·淨名〕 거사이다. 『說無垢稱經)』4)에서는 이 유마〔無垢稱〕 거사를 큰보살〔大菩薩〕이라 일컫고 있으며 그는 부처님께서 비야리성〔毘耶離城·廣嚴城〕의 암라수원(菴羅樹園)에 계실 때 그 성 안에 살고 있던 장자(長者)였었다.

 


경전에 의하면 유마 거사는 일찍이 한량없는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여 깊이 선본(善本)을 심어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으며 심오한 법문에 들어가 반야바라밀〔智度〕을 가장 잘〔最善〕 하였고 방편에 통달하여 큰 원력〔大願〕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는 헤아릴 수 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였으며 그와 같은 방편으로 육신의 병〔疾患〕을 나투었다고 한다.5)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내가 병이 들었다. 일체 중생의 병이 낫는다면 내 병도 나을 것이다.”6)라고 하였으며, 또 “반야바라밀〔智度·慧度〕은 나(보살)의 어머니이고 방편은 아버지가 된다.”7)라고 하였다.

 


지도(智度) 곧 반야바라밀을 모체로 삼아서 실천 방편에 통달하여 큰 원력〔보현행원〕을 성취하였다는 것은 유마(維摩)보살과 광덕 스님의 경우가 너무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불광법회의 중심 사상이 마하반야바라밀〔大智度〕이며 그 행화(行化) 방편의 실천 목표가 ‘보현행원으로 보리(菩提) 이루고, 바라밀 국토를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경전이면서도 앞쪽에서는 “방편에 통달하여 큰 원력을 성취하였다(通達方便 大願成就).”라 하였고, 뒷 게송에서는 “방편을 아버지로 삼다(方便以爲父).”라고 하였는데 이는 효율적인 행화의 실천을 강조한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병상에 앉은 채로 문수(文殊)보살을 비롯한 수많은 부처님 제자와 보살들에게 설법한 유마 거사와, 병을 앓으면서도 헌신전법에 앞장섰던 광덕 스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같은 데가 있다고 하겠다. 유마힐 거사의 이름을 뜻으로 옮겨서 ‘정명(淨名)-깨끗한 이름’·‘무구칭(無垢稱)-때 없는 일컬음’·’멸구명(滅垢鳴)-때를 없애는 울림’ 등으로 쓰는데 이는 다같이 ‘번뇌의 때가 없는 청정〔깨끗〕한 님’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이 ‘번뇌의 때가 없이 맑고 깨끗한’ 유마 거사의 이름과 광덕 스님의 맑고 깨끗했던 상호를 아울러 떠올려 보면, 시공을 초월한 하나의 얼굴이 마음 거울에 그려지게 될 것이다.

 


맑고 깨끗했던 스님의 생시 모습을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그 자세한 언급이 새삼스러울 것 같아서 생략하기로 하지만 단지 스님을 뵙지 못한 이와 앞으로의 후학들을 위하여, “스님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세상에 저렇게 깨끗한 얼굴도 있는가.”8)라고 술회한 한탑 스님의 한 마디를 그 근거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제 대충 살펴본 몇 가지 사례를 통하여서도 우리는 옛날 인도 베살리〔Vesali, 毘舍離·毘耶離·廣嚴城〕에 살았던 정명보살과, 오늘날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활동했던 광덕 스님이 비록 역사적 시대와 장소와 이름은 달라도, 그 두 보살행의 인연을 우연으로 보아 넘기기에는 너무도 닮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정명보살, 곧 비말라끼르띠〔Vimalakirti, 毘摩羅詰利帝·毘摩羅詰·維摩詰·維摩〕를 광덕 스님의 전신(前身)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2. 정명(淨名)의 본원신(本願身) 일행장(日行藏)보살

광덕 스님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정명보살은 그대로 그 본원신이 아니고 따로 본신(本身) 보살이 사바(娑婆) 국토 바깥의 타방세계에 상주하고 있는 보살임이 경전에 밝혀져 있음을 보게 된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에 의하면 정명, 곧 비마라힐은 동방 무진덕(無盡德) 세계의 일행장보살(日行藏菩薩) 분신으로 되어 있다. 무진덕 세계는 무량무변의 항하사 등 여러 불국토를 지난 동쪽에 위치한 첨파가화색여래(瞻波迦華色如來)의 부처님세계〔佛世界〕 이름이다. 이 무진덕세계의 첨파가화색부처님은 과거나 미래세 부처님이 아니고 현재세의 부처님이신데, 석가여래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에 계시면서 당시의 국왕인 빈바사라(頻婆娑羅) 왕 등을 상대로 설법하셨을 때의 일로 되어 있다.
그때 일행장보살은 첨파가화색부처님 앞에서 자신이 사바세계의 석가모니부처님 도량에 모인 대중 가운데의 한 우바새〔거사〕인 비마라힐(毘摩羅詰, 곧 維摩 거사)임을 밝힌다. 그는 그 사실을 확인하여 물으시는 첨파가화색여래를 향하여,

 

 

그러하옵니다. 제가 그 사바세계의 여러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마라힐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 곳의 중생들은 모두 저를 일러 우바새 비마라힐이라 일컫습니다.9)

라고 하였다.

 


이 일행장보살은 스스로의 득력이나 자신의 안락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일체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사바세계에 가서 선설(不爲自身得力自身安樂 當爲利益一切衆生故 往彼宣說) 하며, 또 그는 무량아승지 여러 불세계 가운데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갖가지의 여러 몸을 짓는다(我於無量阿僧祇諸佛刹中 爲化衆生作種種身)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경의 「월장분(月藏分) 본사품(本事品)」에 보면 비마라힐〔日行藏보살〕은 과거세(過去世) 제31겁 비사부(毘舍浮)부처님 때에 석가모니불의 전신(前身)인 불사야약 대바라문(弗沙耶若大波羅門)의 여덟 명 아우 중에 일곱 번째인 불사비리(弗沙毘離)였다고 한다.10) 이 불사비리는 여섯째가 되는 바로 형인 불사수(弗沙樹)와 같이 비사부 여래의 법 중에서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고 다만 탐욕을 떠나 중생을 교화하고자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 것을 낙으로 삼았으므로 그 인연에 따라 석가여래 회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미륵(彌勒)은 불사수의 후신이고 불사비리는 바로 비마라힐의 전신이었음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석가여래의 설법교화 당시에 인도 베살리국에 생존했던 비마라힐〔淨名〕은 동방 무진덕(無盡德)세계의 일행장보살이 분화한 몸(分身)이며, 또한 과거 31겁세(世)에 석가여래의 전신인 불사야약(弗沙耶若) 대바라문의 여덟 아우 중 일곱째로서 형들과 함께 발심수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마경』에는 유마힐이 묘희(妙喜)세계의 무동(無動)부처님〔阿 佛〕 나라로부터 사바세계에 와서 태어난 것으로 보이고 있다.11) 이는 앞에서 본 『대방등대집경』에 설해진 바와는 그 내용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 세계의 이름과 부처님의 명호가 다르며, 또 유마힐의 태어난 인연도 전혀 다르고 그 전신이나 본신에 대한 언급도 없다.

 


비록 국토나 부처님의 이름이 다르긴 해도 묘희(妙喜)세계와 무진덕(無盡德)세계는 다같이 동방에 있는 불국토이다. 설령 동일한 국토와 불명(佛名)이라고 하더라도 경전에 따라 다르게 일컬어지는 경우가 없지 않으므로, 세계와 부처님의 명호가 다른 점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마힐이 이 사바세계에 내생(來生)한 인연에 관해서는 두 경우가 전혀 다르다.

 


『대방등대집경』에서는 무진덕세계의 일행장보살이 현재 그 국토의 첨파가화색여래(瞻波迦華色如來) 앞에 있으면서 그 일부분의 몸(分身)이 사바세계에 와서 유마힐(毘摩羅詰)이라는 이름으로 중생교화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유마경』에서는 일행장보살의 이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서 수명이 다하고 이 세계에 와서 태어난 것(彼國沒而來生此)’으로 되어 있다. 곧 분신이 와서 태어난(來生한) 것과 수명이 끝나고〔沒而〕 이 세계에 와서 태어난 것은 전혀 같을 수가 없는데, 그 쪽 세계의 생명이 다하고 이 곳(사바국토)에 태어났으니까 그 동방세계에는 본신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유마경』에서는 ‘와서 태어난’ 인연 등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대충 설명하였으므로, 『대집경(大集經)』에서 그와 같이 세계와 불명(佛名)까지도 분명하게 하여 와서 태어난 인연을 구체적으로 밝혔던 것이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어쨌든 『대집경』에 의해 밝혀진 비마라힐(淨名보살)의 본원신인 일행장보살과 그 국토인 동방 무진덕세계의 이름에서도 광덕 스님과 스님의 불사법회(佛事法會)인 불광(佛光)과의 어떤 연계성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할 수가 있다. 우선 동방은 태양이 떠오르는 쪽이며 새로움과 밝음의 빛을 뜻하는 방위인데, 그 세계의 이름인 무진덕(無盡德)은 새롭고 밝은 빛의 덕(德)이 한량없고 다함이 없다는 뜻으로 볼 수가 있으니, 그렇다면 그 한량없는 빛의 덕이 부처님의 광명〔佛光〕보다 더함이 있겠는가. 또 일행장(日行藏)은 태양의 운행과 그 덕행이 무궁무진한 보배창고〔寶藏〕와 같음을 뜻하는 이름으로 볼 수가 있는데, 그 또한 태양과도 같은 부처님 광명의 크나큰 덕〔光德〕을 표현한 말이 아니겠는가 싶다.

 


그와 같이 본다면 동방 무진덕(無盡德)은 불광과 통하고 일행장(日行藏)은 광덕(光德)과 연결지어진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구태여 그렇게 나누어 견주지 않더라도 서로가 뜻으로는 똑같이 통하는 이름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또 스님의 법호인 ‘금하(金河)’도 진금색신인 부처님의 광명이 강물의 흐름처럼 무궁무진하여 끊임이 없다는 뜻으로 볼 수가 있으니, 그렇다면 무진덕 및 일행장과도 상통하는 바가 전연 없지는 않다고 할 것이다.12)

 


그러한 이름들은 일부러 또는 억지로 맞추어 그렇게 지었을 리는 만무하리라고 본다. 이는 물론 우연일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며, 불가사의한 본원력의 필연적인 인연의 힘에 의하여 그와 같이 드러나진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전혀 인위(人爲)적이 아닌 본원력(本願力)의 꾸밈없는 인연법과 연기(緣起)의 자연스런 힘이 결과된 소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13)

 


그러므로 오늘의 불광운동 진리의 모임〔法會〕은 그처럼 구원(久遠)한 연유(緣由)와 깊고도 현묘한 크신 보살(마하사뜨바·摩訶薩 )님의 거룩한 원력(또는 행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불사(佛事)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한 까닭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실감하면서도 경근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이 일대불사의 중심 사상과 전법(傳法) 행화의 실천에 관하여 총괄적으로 조명해 보려고 한다.

 

 

 

-----[註]-------------------------------------------------------------

 

 

 

 

  1. 『妙法蓮華經』 권1, 方便品 제2(『大正新修大藏經』 9권 p.7 상단).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
  2. 김재영 편저, 『광덕 스님의 생애와 불광운동』(불광출판부, 2000년 6월 30일 재판) p.368의 「결론」 1.광덕 스님, 우리 시대의 普賢.
  3. 實又難陀 역, 『大方廣佛華嚴經』(80華嚴) 권49, 普賢行品(大正藏 p.259 상). "爾時普賢菩薩摩訶薩… 欲明大威德 菩薩爲一切衆生現形說法 令其開悟." 般若 역, 『大方廣佛華嚴經』(40華嚴) 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권 39 (大正藏 10, p.840 상). "爾時善財瞳子… 見普賢菩薩 一一身分 一一肢節 一一毛孔 悉有三千大千世界…" 등.
  4. 唐 玄  역, 『設無垢稱經』 권1, 顯不思議方便善巧品 2(大正藏 14, p.560 중) "爾時廣嚴(毘耶離)城中 有大菩薩…".
  5. 鳩摩羅什 역, 『維摩詰所說經』 권상, 方便品 2(大正藏 14, p.539 상 중). "已曾供養無量諸佛 深植善本 得無生忍… 入沈法門善於智度 通達方便 大願成就. …以如是等無量方便饒益衆生 其以方便現身有疾."
  6. 위와 같은 경의 중권, 文殊師利問疾品 제5(위와 같은 권, p.544 중). "…以一切衆生病 是故我病, 若一切衆生病滅 則我病滅."
  7. 위의 경 같은 권, 佛道品 제8(위의 大正藏 14, p.549 하) "…於是維摩詰以偈答曰智度菩薩母 方便以爲父." (玄奬譯本에서는 智度를 慧度로 하고 있으나 마찬가지로 '般若波羅蜜'의 뜻옮김말 곧 意譯語임.)
  8. 한탑 스님(聞思修 회주), 「부처님을 대중 속에 심어주신 큰별」(『佛光』특집 '광덕 큰스님을 기리며', 1999년 4월호) p.52
  9. 隋 那連提耶舍 역, 『大方等大集經』 권 35, 日藏分 陀羅尼品(大正藏 13, p.240 하) "爾時瞻波迦花色佛 告日行藏菩薩言 善男子 彼娑婆世界釋迦牟尼佛大集衆中 有一優婆塞名毘摩羅詰 是汝身不. 時日行藏菩薩… 作如是言 如是如是 我於彼刹爲欲敎化諸衆生 故名毘摩羅詰 彼諸衆生皆謂 我是優婆塞毘摩羅詰."
  10. 위의 경 권 48, 月藏分 本事品(大正藏 13, pp.311 하∼313 하).
  11. 『維摩詰所說經』권하, 見阿 佛品(大正藏 14, p.555 중) "是時佛告舍利佛 有國名妙喜 佛號無動 是維摩詰於彼國沒而來生此."
  12. 스님의 本願身에 대한 緣起談은 지난해 도솔산 到彼岸寺 주지 松菴 스님의 초청을 받아 반야바라밀 결사 도량에서 잠깐 이야기(談說) 형식으로 우설(愚說)한 바가 있었으나 佛經상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기회에 출전을 밝혀서 문자로 간략하게 재정리해 본 것이다.
  13. 스님의 법명과 법호에 관한 백운 스님의 글을 여기에 참고로 옮겨본다. "스님의 법명이 빛 광(光)자 큰 덕(德)자 인데, 이걸 해석하자면 '덕을 빛낸다' '광명의 덕'입니다. 우리가 반야를 말할 때 반야광명이라고 하지요. 광명은 반야, 반야광명의 덕이다, 이런 뜻이지요.
    먼 훈날입니다만, 고암 스님이 종정으로 계실 때 , 법호를 쇠 금(金)자를 써서 '금하(金河)'라고 받았어요. 금은 광명을 상징합니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어요.
    금강경을 가지고 반야바라밀을 선양하고 다니신 분이 반야광명이라고 광자를 넣은 이름을 받더니만, 또 고암 스님께 여러 형제들의 법호를 받았는데, 스님은 금하라는 법호를 받았어요. 금색 광명이 나는 큰 하천, 이름과 법호가 전부 반야의 뜻을 갖게 되었는데, 우연이 아니지요. 따져보면 전부 인과지요."
    (월간 『佛光』1999년 6월호, p.26 및 『광덕 스님의 생애와 불광운동』pp.102∼103).

    [출처] 불광운동|작성자 임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