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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주위에서 발생되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을

날마다좋은날 2015. 6. 20. 08:09

 요즘 우리 주위에서 발생되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을 지켜보며 깊은 우려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더 이상 개인의 문제차원이 아닌 개연성을 가지고 이 시대 이 나라의 구성원으로 집단적 무의식에 문제가 즉각적으로 표출되는 현상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유년시절 우리 모두는 성장과정동안 다양한 외부적 경험과 충격적 일들로 내면을 만들고 겹겹이 쌓아져 성인이 되어갑니다. 특히 5~6세까지의 과정중 인성교육이 제대로 충족되어지지 못하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성장애증을 보이며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타인에게 향하는 시선으로 해결하려 왜곡된 분노, 증오, 한으로 표현합니다. 이 사건들을 그들의 잘못만큼 벌하고 격리 시켜야 한다는 것도 타당하지만 과연 나의 내면에도 혹 그런 처리되지 못한 억울함이나 분노가 있는가하는 것을 자문해보았습니다.
 천수경에 진실어중선밀어(眞實語中宣密語)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올 한해 어떤 마음을 일으켜 자비심으로 어떻게 일 년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화두처럼 새기어 실천할 것을 저와 약속해야 합니다. 무위심(無爲心)이란 의도 없이 이는 마음, 자기가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마음, 욕심 없이 일어나는 마음, 이것이 진정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자아가 없는 자비심, 이것을 천수경에서는 "무위심내기비심" 이라고 합니다.
 스위스 심리학자 융(C.G.Jung:1875~1961)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세계를 현현한 것, 드러난 것 을 인생이라 하였습니다. 융은 프로이드 밑에서 수학하다 결별하게 되는데 그는 끊임없이 자기 내면에 있는 리비도(Libido)를 강조 하였는데 융은 리비도에 개인적 경험에만 치중한 것에 이견을 가지고 집단적 무의식의 개념을 도입 하게 됩니다. 융은 불교를 통해서 자기 한계를 극복합니다. 티벳에 가면 바르도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말로 '사자의 서' 입니다. 사람이 태안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성장하며 죽은 그다음 세상이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한 유명한 저술서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자의 서는 '티벳 사자의 서'와 '이집트 사자의 서'가 있습니다. 그 중에 티벳 사자의 서는 파드마 삼바바 라는 유명한 수행자가 저술하였고 이 바르도를 통해 융은 자신의 심리학을 최종적으로 완성 시킵니다.
 융의 말처럼 "인생은 무의식의 현현" 즉 요즘 일어나고 있는 극악 잔인한 사건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들 또한 성장과정에 있어서 필요한 사랑, 관심, 인정, 칭찬 속에서 케어 받지 못한 불행한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성장의 상처들은 또 다른 상처, 결핍, 한, 억압된 모습으로 우리들의 무의식의 세계에 고스란히 저장되어있습니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이드(Id)라 했고 부처님께서는 업장, 업력, 업식 이라고 표현 하셨습니다.
 이 흔적들이 우리 속에 남아 업력(왜곡된 마음의 힘)에 의해 우리 인생 전반이 좌지우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내면 깊숙히 소외되거나 처리 되지 못한 감정들, 결핍으로 남겨진 것들은 현실에서 명품에 대한 집착, 콤플렉스를 해소키 위한 각가지 행위로 표현되어집니다. 내면의 결여는 외부로부터 결코 충족 되어 지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모순이 아닐지요.
부처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내속에 있는 무의식속 어두운 그림자들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어둔 그림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생이 평안 할 수 없습니다. 그 그림자들은 복제되듯 멈추지 않고 그림자가 인생이 되어갑니다. 인생은 메아리와 같습니다. 산에서 소리 쳤을 때 그 소리가 다시 되돌아옵니다. 그것은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이 낸 목소리입니다. 내가 대하는 상황에서 다툼이나 싸움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상대가 나쁜 것이 아니라 내속의 숨겨진 분노, 원한, 증오, 시기, 미움의 표출이 남을 통해 발산되어져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 입니다. 남은 또 다른 나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융이 말한 무의식의 현현 입니다.
 내가 편안 할 때는 배우자나 주위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넘어가나 내 마음이 불편 할 땐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도 격하게 반응합니다. 이것 또한 내 무의식속의 탐, 진, 치 삼독심이 정화되지 않은 결과라 보심 됩니다. 불행의 요인 무의식 즉 업식 대로 살다보면 죽을 때까지 불행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생각하고,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이 삼업은 장년이 되면 더 이상 변화되지 않고 내가 갖고 있는 의식의 세계와 함께 고착됩니다. 마치 콘크리트가 굳어지듯 시간이 흐르면 더 견고하게 고착화되어 그 업을 가지고 그대로 다음 생으로 넘어 갑니다. 사람이 내생에 어디에 태어나는가는 죽기 직전의 모습을 보면 대충 알수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만나지는 다양한 특징들 중 발전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고집, 집착, 편견, 자기주장이 강하며 그것이 진정한 나라여기며 더 크게 매달 립니다. 살아가며 재산의 손실, 돈의 수탈을 당할 땐 내속에 과욕이 있음을, 가는 곳 마다 싸우게 되면 남을 무시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이 삭혀지지 않았음을, 황당한 일이 일어나면 치심 즉 어리석음이 내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부터 문제를 풀어 나가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 속에서 문제를 풀어 가는 것이 아니라 늘 자기잘못은 없고 남 탓을 하는 것으로 향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10년 전을 봐도 10년 후를 봐도 늘 똑같이 발전이 없습니다. 원망은 원망을 낳고 감사는 감사를 낳고 자기반성은 반성을 낳습니다. 이 오묘한 메카니즘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 무의식의 세계, 업장, 업식의 세계가 얼마나 인생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바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가족을 바라볼 때 힘든 부분은 내속에 힘든 부분이 용해되지 않아서이며, 속상하고 불편한 것들 또한 내속의 어둔 그림자를 가족이란 대상을 통해 보여줄 뿐입니다. 내 속에서 정화 작용, 진정한 자비심이 일어나야 수행도 진전이 되고, 공부도 진전이 되고, 얼굴표정, 눈빛이 밝고 부드럽게 빛나 나와 남이 행복해집니다. 시대가 변하여 예전보다 훨씬 윤택한 생활들을 함에도 왜 우리는 표정이 밝지 못하고 굳어져 살아가는가를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무의식의 세계에 남아있는 삼독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비심, 내가 없는 자비심, 탐진치(삼독)없는 자비심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자비심에 대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무착보살(無着菩薩), 아상카(Asanga)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상카는 인도 나란타 대학에서 불교를 공부하던 중 근본적인 의문이 풀리지 않아 미륵부처님을 만나 의문점을 해결 하리라 생각하고 동굴에 들어가 무문관 기도를 3년씩 네 차례에 걸쳐 수행했으나 미륵부처님을 친견치 못하자 포기하고, 하산 중에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개가 두려움에 떨며 아상카를 보며 짖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개의 하체가 썩어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상카는 부처님이 전생에 수행하시면서 필요로 하는 이에게 자기 생명도 나누었다는 일화를 떠올리고 비록 자신은 미륵불을 친견치 못하고 포기하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 개의 하체 부분에 있던 큰 구더기들을 옮기고 남은 작은 구더기들을 손으로 만지면 생명이 다할까하여 자신의 혀로 옮기려 개의 상처를 핥았으나 자꾸 땅에만 혀가 닿을 뿐 상처에 닿지 않았다 합니다. 그 순간 개가 미륵불로 화하여 나타나자 비로소 자신에 대한 집착, 자기가 일으킨 욕심, 탐착, 무명으로 인하여 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 몸이라도 보시 하고자 하는 자비심을 일으킨 아상카의 자비심이 곧 "자기가 없이 일으킨 진정한 자비심"입니다.
 올해는 저와 함께 자아가 없는, 자기가 없는, 자비심을 일으키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그것은 결국 자기 것이 됩니다. 나 없는 자비심, 자기 없는 자비심, 진실한 자비심, 무위심내기비심 이것이 인생을 행복으로 연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