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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의 달인’ 초파리에 빠져들다

날마다좋은날 2009. 5. 8. 17:21

‘연구의 달인’ 초파리에 빠져들다
[여기에 오기까지] 문학 소년, 생화학에 반하다

정종경 세포성장조절유전체연구단장
경상남도 시골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집안의 막내. 문학에 소질이 있던 한 아이가 과학자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지극히 단순하다. 약사였던 둘째 형이 집안에서 돈을 제일 많이 벌었다는 것이다.

“막내였기 때문인지 진로에 대한 생각이 딱히 없었어요. 그저 둘째 형이 부러워 서울대 약학과를 선택했을 뿐이지요.”

세포성장조절유전체연구단을 이끄는 KAIST 생명과학과 정종경 교수는 무덤덤하게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시위가 한창이던 대학 시절 정 교수는 수업이 쉬는 날이면 혼자서 원서의 매력에 푹 빠졌다. 고등학교 때까지 보던 책보다 논리정연하고 원리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원리를 깨달으니 궁금증이 연달아 해결되는 것도 신기했다.

약대에 왔지만 화학에 관심이 깊어진 것도 이맘 때다. 외울 것이 많은 학문이어도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흥미를 느낀 탓에 꾸준히 공부할 수 있었다. 생명현상의 기초가 되는 유기화학의 기초를 튼튼히 닦으니 다른 분야의 이해도 빨랐다.

“생물과 화학이 섞인 분야에 관심이 많았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생명과학연구를 할 환경이 부족했어요. 인터넷도 없던 터라 정보가 풍부한 미국 유학길에 나서게 됐습니다.”

[어려움을 넘어] 연구는 내 운명

미국 하버드대 유학을 시작하며 정 교수는 분자생물학이나 세포생물학이 주목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존 블레니스 교수의 세포신호전달 연구실로 발길을 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유학 시절 정 교수에게는 연구가 삶의 전부였다. 지금까지도 연구 외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다고 하니 연구를 위해 태어났나 싶단다. 한정된 실험 장비를 독차지하기 위해 새벽 3,4시에 출근하기를 반복했다. 몸이 고단하다보니 저녁에는 8,9시면 잠들었다.

한 번 실험을 시작하면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몇 시간을 보내는 게 그만의 연구 방식이었다. 그러기를 4년. 박사 학위를 받기 얼마 전엔 신장결석이라는 병을 얻기도 했다. 여전히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그는 KAIST에서도 ‘연구의 달인’으로 유명하다.

[나의 성공담] 홀로 지샌 연구실의 밤이 준 선물

1991년 어느 날 연구실에 온 지도교수는 ‘라파마이신’이라는 면역억제제를 내려놨다. 이 약의 효과를 한번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때마침 뉴욕에서 열리는 행사 때문에 교수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이 자리를 비웠다.

정 교수는 그날 밤 이 약을 붙잡고 밤샘 실험에 돌입했다. 새벽쯤 놀랄만한 결과가 나왔다. 라파마이신을 처리한 시료에서 나타나야 할 단백질이 하나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라파마이신이 단백질을 합성하는 특정 신호전달경로를 차단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뉴욕에서 돌아온 지도교수는 처음엔 정 교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실험과정 중에 뭘 빠뜨린 게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였다. 다시 한 실험에서 같은 결과가 나오면서 정 교수는 이듬해 세계적인 학술지 ‘셀’에 제1저자로 논문을 게재했다.

이 때 발견한 신호전달경로는 지금까지도 세포신호전달 연구에 중요한 축이 되고 있다. 라파마이신을 표적으로 하는 단백질의 신호전달연구는 여전히 많은 연구자의 연구주제기도 하다.

[세포성장조절유전체연구의 미래상] 난치성 질환 정복까지

파킨슨병에 걸리게 한 초파리(왼쪽)와 정상 초파리의 가슴 부위를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모습. 파킨슨병에 걸린 초파리는 근육세포가 손상돼 겉모양이 울퉁불퉁하다. 사진 제공 KAIST

최근 정 교수의 연구는 일거수일투족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유전자의 기능을 세계 최초로 밝혀내 영국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2006년 발표했다. 이듬해엔 당뇨병과 비만 조절 유전자로 알려진 ‘AMPK’가 손상입은 세포를 회복시켜 암을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또 한번 ‘네이처’에 실렸다.

10년 전부터 시작한 초파리 연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정 교수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1만3000여개나 되는 초파리 유전자를 각각 돌연변이 시켜 10만 종류의 유전자 변형 초파리를 만들었다. 초파리는 사람과 질병 유전자가 70%나 같고 한 세대가 2주에 불과해 유전자 연구에 적합하다. 정 교수는 초파리의 단순한 세포신호전달 체계를 활용해 머리 속에 있던 유전자 기능에 관한 가설을 하나하나 증명할 수 있었다.

정 교수는 AMPK 유전자의 기능을 활성화해 암을 치료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파킨슨병 치료제 개발도 염두에 두고 있다. 세포성장과 관련한 신호전달 체계를 바로 이해해 질병의 원인을 밝힌다면 어떠한 난치성 질환도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세포성장조절유전체연구란 [퍼즐 게임]이다.

정 교수는 세포성장조절유전체 연구는 ‘퍼즐 게임’이라고 말한다. 세포 속에 백사장 모래처럼 많은 신호전달의 퍼즐 중에서 필요한 조각을 찾아 맞추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퍼즐을 하나 맞출 때마다 그동안 몰랐던 질병의 메커니즘을 하나하나 밝혀내는 환희가 있다. 게임에 임하는 정 교수는 매번 개척자의 마음을 되새긴다. 질병을 완전히 이해하고 치료제를 개발할 때까지 잠시도 멈춰 서지 않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