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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차 농부 이명학 씨의 리얼 귀농 스토리

날마다좋은날 2009. 2. 23. 18:25

10년차 농부 이명학 씨의 리얼 귀농 스토리
환상 버리고 새 생명을 얻다

“다 때려치우고 시골 내려가서 농사나 지을까?” 불황, 해고, 실직, 도산…. 경제 거품이 순식간에 소멸되고, 절망의 골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시골로의 회귀를 꿈꾼다. 살아남기 위해 극도로 곤궁해진 인생을 아무런 조건 없이 포근하게 살찌워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은 채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사실 ‘귀농’은 부단한 준비 과정과 노력이 수반돼야 하는 작업. 귀농 10년 차 이명학 씨가 “목가적인 전원 생활에 대한 환상은 이내 쩍쩍 갈라지는 마른 논바닥이 된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완벽하게 ‘탈도시’하지 못하면 십중팔구 실패한다는 것.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 역시 뼛속 깊이 농부가 되기 위해 감내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경북 상주에서 농부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이명학 씨의 ‘리얼 귀농 스토리’.

“숨 가쁘게 직장 생활을 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 남편, 누구 아빠’라는 기대치에 맞춘 게 아니라 내가 원하고 선택한 삶을 산 적이 있는가? 대답은 ‘노’였죠.”
한번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삶을 살고 싶던 이명학 씨(45). 결혼 전부터 꿈꿔온 ‘귀농’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책이 없었을 뿐 농촌에 대한 향수는 늘 있었어요. 농촌으로 가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다니던 직장 그만둬서 처자식 굶기는 건 아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들이 꽉 찬 상태로 직장을 다녔으니… 생활이 정말 빡빡했죠.
하루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기러기 떼가 V자를 그리며 날더군요. 그때 무조건 농촌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새들도 마음대로 자기가 가고픈 곳을 찾아가는데, 인간인 나는 뭔가’ 싶었죠. 우습겠지만 기러기를 보고 매인 사슬을 끊을 수 있는 힘이 생겼어요. 안 믿기죠?(웃음)”
농사보다 힘든 아내 설득하기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이명학 씨의 결정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서른둘, 한창나이에 농촌을 택하다니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 대부분.게다가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일반인들에겐 ‘귀농’이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었다.
“농사보다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당신이나 내려가서 농사짓고, 돈이나 따박따박 부쳐라. 난 안내려간다’며 펑펑 울더군요. 정말 괴로웠습니다. 귀농 결심 전에는 부부였는데, 한 이불 속에서 다른 생각을 하니까 이상하데요. ‘부부라는 게 도대체 뭔가’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혼돈스러웠죠.”
하지만 평생 꿈을 쉽사리 접긴 힘들었다. ‘시간을 갖고 기다리자’고 결심한 이명학 씨. 이른바 ‘아내 설득하기 장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우선 농사에 대한 아내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도시 근교 주말농장을 시작했다. 더불어 아내와 함께 귀농인들의 집을 수시로 찾아갔다. 선배 귀농자의 노하우를 배우고, 젊은 엄마도 시골에 산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아내의 경계심도 늦추고, 부부 여행도 되니 일석 삼조인 셈.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아내에게도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어요. 슬쩍 ‘여보, 나 사표를 써야겠는데’라고 말을 흘렸어요. 그런데 의외로 아내가 ‘응, 그래. 사표 쓰고 싶으면 써’라고 대답하는 겁니다. 신이 나서 당장 회사에 사표 내고 왔죠. 2년 동안 늘 가슴에 사표를 품고 다녔거든요. 정작 그날 저녁 아내는 기절초풍했죠. 지나가는 말로 한 건데, 그렇게 빨리 실행에 옮길 줄 몰랐다면서요.”
이명학 씨는 반드시 귀농 전, 부부간 합의가 돼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상대가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귀농은 실패의 첩경이라고. ‘내려가면 아내 생각도 바뀌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은 애초부터 버리는 게 상책이다.
귀농 3년 차 = 절망? 자신만의 목적의식 必
3년 정도 준비한 끝에, 드디어 1999년 12월 17일 경상북도 상주에 새 보금자리를 튼다. 상주는 이명학 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남들보다 준비 기간이 길었건만 다 허물어져가는, 연세(시골집은 통상 전세나 월세가 아닌 1년 단위로 세를 받는다) 20만 원 짜리 흙집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부터 고향으로 내려오려고 한 건 아닙니다. 전남 화순 등지에 여러 군데 집을 봐뒀죠. 이삿짐까지 싸놨는데, 주인집 아들이 갑자기 세를 안 준다는 거예요. 엄동설한에 당장 짐은 빼야 하고, 뾰족한 수가 없어 아버지에게 통사정을 했죠. 아버지가 그렇게 차갑게 대하실 줄은 몰랐어요. ‘저 비탈 위에 빈 집이 있는데 보고 가든지’라며 문을 탁 닫고 나가셨죠. 정말 그땐 서운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고향으로 귀농하는 건 말리는 편입니다. 부모님들에겐 멀쩡하게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던 자식이 시골에 내려오는 건, 그 자체가 수치죠. ‘자식이 건강이 안 좋냐, 직장에서 잘렸냐, 사업에 실패했냐, 보증 잘못 섰냐’ 등 몇 년이고 동네 사람들 입방아에 오릅니다. 어머니께서 ‘네가 농촌에 들어와서, 내가 한 2년은 고개를 못 들고 다녔다’고 말씀하셨을 땐 가슴이 미어졌어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집. 당장 난방이 문제였다. 땔감용 나무가 없어 침대, 의자, 식탁 등 아직 할부도 끝나지 않은 각종 가재도구들로 불을 땠다.
“어차피 시골집이라 도시 세간은 들어가지 않으니 아까워할 필요도 없었죠. 한 일주일을 때고 나니까 집에 짐이 굉장히 잘 들어가던데요. 하하. 귀농을 하면 우선 농촌에 맞는 생활 방식을 익혀야 합니다. 도시 생활을 주렁주렁 달고 오면 더 괴로운 곳이 농촌이에요.”
이명학 씨는 직접 경험해보니 ‘귀농 1년 차 낭만 - 3년 차 절망 - 4년 차 포기 - 5년 차 희망’이라는 말이 딱 맞는다고 했다. 첫해에는 마당에 난 잡초도 예쁠 정도로 (동네 사람들은 마당에 난 풀도 안 뽑고 산다며 욕하는 것도 모른 채) 모든 게 좋단다. 하지만 3년째에는 ‘야생적인’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고.
“죽을 고생을 하고, 3년 정도 시간이 흐르니 풍년이었어요. 배추, 벼 등 모든 게 잘 됐죠. 배추 출하가 내일모레인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논은 물에 잠기고, 산사태로 배추가 다 밀려 내려왔죠. 나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닙니까. 기막혀서 술만 퍼마셨어요.
그런데 우연찮게 귀농을 결심할 당시에 쓴 일기를 읽었습니다. 도시가 주는 갑갑함, 쳇바퀴 돌리는 듯한 직장 생활, 상사가 주는 스트레스와 거기에서 풀려났을 때 느낀 자유로움…. 그걸 딱 들여다보니까 힘이 생기더군요. 무엇 때문에 농촌에 들어왔는지 상기한 거죠. 귀농자에겐 각종 농업 지식이나 자본금보다 자신만의 목적의식을 정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아무리 힘겨운 일이 닥쳐도 견딜 수 있죠. 당시 저랑 비슷한 피해를 입은 귀농자는 다시 도시로 올라갔어요.”
월 생활비 40만 원, 도시 소비 습관 버려야
이명학 씨는 요즘 8천265m2(2천500평) 규모의 농사를 짓는다. 3년 차까지는 1만3천223m2(4천 평) 가까이 하다가 도리어 규모를 줄였다. 농사 종류도 달라졌다. 고추, 벼, 배추, 감자 등을 키우다가 최근엔 오미자도 재배한다. 땅은 줄곧 임대를 고집하고 있다. 대출을 받아 사기에는 이자 부담이 너무 커서다.
“직장인은 월급을 받기 때문에 생활 사이클이 한 달이지만, 농업은 1년입니다. 한 해 농사 망치면 1년 동안 손가락 빨고 살아야죠. 귀농 초기 자본금이 3천만 원이었는데, 1년 반 정도 지나니 통장에 딱 5만 원이 남았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죠. 아, 이게 현실이구나. 그때부터 다른 집 과수원이나 배추밭에서 날품팔이를 했어요. 수입의 60퍼센트는 농사로 충당하고, 나머지 40퍼센트는 날품팔이로 보충합니다.”
힘들어 보이지만 날품팔이는 오히려 이명학 씨에게 훌륭한 공부가 됐다. 그는 농업 지식을 귀농학교에서 배웠다. 초기부터 고집해온 유기농법부터 귀농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이곳에서 체득했다. 여기에 날품팔이를 하면서 익힌 다양한 농사법과 인맥은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농촌에 살면 돈 쓸 일이 거의 없어요. 도시에선 애들이 나가기만 하면 뭘 사 달라고 졸랐죠. 이곳에선 5천 원 주고 뭐 사먹으라니까, 처음엔 땀을 뻘뻘 흘리고 30분 정도 걸어 내려가서 과자 하나 사 먹고 옵디다. 그런데 몇 번 하고 나니 안 먹더라고요. 드디어 모든 걸 돈으로 대체하는 삶에서 벗어난 거죠.
대신 본인이 해결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영하 28도까지 내려간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 났는데, 보일러 수리공이 오지 않아요. 여기 방문할 시간이면 20군데 더 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나중엔 오기가 생겨서 제가 한 일주일을 보일러와 씨름해서 고쳤습니다. 이젠 보일러 일류 기술자 뺨쳐요.”
지난해 12월 이사한 새집 역시 그가 지은 집이다. 대지 1천653m2(500평)에 126m2(38평)짜리 집을 홀로 지었다. 1m2당 2만 원, 1천만 원을 주고 산 땅이 최근에 올라 1m2에 5만 원 정도다. 집을 짓는 데는 1m2당 190만 원 정도 들었다.
“농촌에는 돈으로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많아요. 때문에 도시의 소비 패턴과 생활 습관을 농촌에 걸맞게 바꿔야 합니다. 요즘에야 아이들이 자라 월 생활비가 100만 원이지만 초기엔 40만 원이었어요. 도시에서 월 300만 원 필요하던 사람이 시골에서도 똑같길 바라면 귀농해선 안 됩니다.”
가장 어려운 건 자녀 교육 문제
이젠 탄탄대로인 듯 보이는 이명학 씨도 한 가지 고민이 있다. 바로 자녀 교육 문제다.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맏딸 아름소리 때문. 중학교 3년 내내 장학금을 받는 등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이명학 씨에겐 걱정거리다. 집 근처 교회에서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강의와 학습지가 딸의 유일한 공부 수단. 학원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집 근처 39킬로미터(100리) 안에 학원이 한 곳도 없다.
“자랑이 아니고, 진짜 고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자녀 대학 보내는 건 안중에도 없어요. 그렇게 가르칠 능력도 없고요. 저는 아이들 인성 교육에는 자연과 벗하는 시골이 좋다는 생각에 짐 싸들고 내려왔습니다. 그걸 갑자기 틀어서 경쟁의 대열에 아이를 올려놓고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요. 귀농인들끼리 모여 귀농자 고등학교를 만들어볼 생각도 했습니다. 귀농자 자녀들에게 필요한 강좌를 개설, 맞춤 교육을 하는 셈이죠. 물론 쉽게 해결될 부분은 아닙니다.”
아직도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명학 씨는 여전히 농촌의 삶에 만족한다.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산업화로 무너져버린 농촌 사회가 다시 활기를 띠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산촌 유학’ 운동을 벌인 적도 있다. 도시 어린이가 농촌에서 1년 정도 생활을 하는 것. 유년 시절 시골 생활도 경험하고, 장성한 뒤 농가와 도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최근엔 재정적인 문제와 여러 반대에 부딪혀 잠시 활동을 접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활성화되고 있단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귀농해서 한 달 정도를 아침에 일어나서 무의식적으로 장롱 문을 열고 와이셔츠 입고, 넥타이를 맸어요. ‘직장이 이렇게 암묵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구나’깨달았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갈 겁니다. 저는 도시의 삶이나 농촌의 삶, 어느 하나가 더 좋고 나쁘다는 생각은 안 해요. 개인의 특성에 맞춰 사는 거죠. 저에겐 농촌의 삶이 평온했기 때문에 귀농을 했습니다. ‘실패했으니 농촌에 간다’는 편협한 사고가 아니라 이런 삶도 있다는 것. 다양성을 인정받는 사회가 되면 바랄 게 없죠.”
반나절이 넘게 이어진 인터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아직 못다 한 얘기가 많건만 서둘러 얘기를 끝마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시간을 많이 뺏은 건 아닌지 미안함을 표하자, 도리어 그는 언제든지 힘들 때면 와서 쉬어가라며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추운 날씨에도 한사코 동네 어귀까지 배웅을 나오는 이명학 씨. 가식 없는 웃음 속에는 인생의 묘미를 깨달은, 선택받은 자의 여유로움이 아른거렸다. 투박하지만 진솔한 ‘흙빛’처럼 그의 삶은 안식을 찾은 지 오래다.

이명학 씨 ●●●
상주귀농지원센터 이명학 이사. 귀농을 결심할 당시 아무것도 몰라 막막하던 자신과 같은 이를 돕기 위해 상주귀농지원센터를 열었다.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체득한 각종 귀농 정보를 아낌없이 알려주고 있다. 집 바로 옆에 83m2(25평) 규모의 작은 공간도 마련, 귀농 예비자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워낙 본인이 고생했기에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라고. 인천 지역에 귀농학교가 설립되는 토대 역할을 했으며, 도시와 시골의 행복한 만남을 꿈꾸는 ‘산촌 유학’ 프로그램을 진행했다.